1960년 ‘로맨스 빠빠’로 데뷔
감독·제작자로도 영화계 활약
엄앵란과 ‘세기의 결혼식’
끊이지않는 스캔들 양산도

 

“난 ‘딴따라’가 아닙니다. 종합예술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입니다.”

4일 새벽 향년 81세로 타계한 신성일은 한국 영화 역사와 발자취를 함께한 ‘영원한 스타’였다.

빼어난 외모와 지적이고 반항적이면서 성적 매력이 넘치는 이미지는 1950~60년대 기존 배우들과 차별화하며 그를 당대 최고 청춘스타로 만들었다.

1937년 서울에서 출생 후 생후 3일 만에 대구로 이주한 신성일은 어린 시절부터 공부와 운동 등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경북고를 졸업한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무작정 상경해 서울대 상대에 지원했으나 낙방했다.

그러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갔고, 3000여 대 1의 오디션 경쟁률을 뚫고 당시 신상옥 감독이 세운 신필름 전속 연기자 됐다.

신 감독 영화 ‘로맨스 빠빠’(1960년)로 데뷔한 이후 신필름을 나와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작품은 김기덕 감독 ‘맨발의 청춘’(1964). 카리스마 넘치면서도 반항적인 이미지로 당대 최고 스타가 됐다.

신성일은 인기 최절정기인 그해 11월 워커힐호텔에서 엄앵란과 결혼했다. 하객과 팬 4000명의 인파가 몰린 두 사람의 ‘세기의 결혼식’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당대 최고 스타답게 스캔들도 끊이지 않았다. 그는 2011년에 펴낸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연극배우와 아나운서로 활동한 고 김영애(1944~1985)씨를 1970년대에 만나 사랑한 이야기를 공개, 파장을 일으켰다.

이런 스캔들과 상관없이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은 누구보다도 컸다. 그는 연기를 넘어 1971년엔 ‘연애교실’로 감독에 입문했고, 1989년에는 성일시네마트를 설립해 제작자로도 활동했다.

70대에도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며 건강에 신경 쓴 그는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 당시 그는 “그깟 암세포 모두 다 떨쳐내겠다. 이겨낼 자신이 있다”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지난해 부산에서 취재진과 만나 “나는 ‘딴따라’ 소리가 제일 싫다. 영화를 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종합예술 속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북 영천에 한옥을 지어 살던 고인은 그곳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소규모 음악회를 여는 등 사람들의 쉼터로 만들겠다는 구상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고인은 마지막 바람들을 끝내 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과 이별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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