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동은 울산 동면(방어진읍) 지역으로 서부라 하였는데, 1914년 대편동을 병합해 서부리라 하다가, 1962년 울산시에 편입되면서 동(洞)이 되었다.

 옛날에는 밭이었던 이곳에 어느 농사꾼 부부가 농사와 함께 바다에 나가 해초도 뜯어먹으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얄궂게도 이 내외가 모두 병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슬하에는 아직 어린 오누이 밖에 없는 딱한 처지였다. 그들 오누이는 직접 밥을 지어 먹고 부모의 병도 돌보았다. 마을 어른들이 와서 산에 가면 좋은 약이 있다 하면 산으로 갔고, 들풀이 좋다하면 들로 나가 캐어왔다. 어느 누구네 집에 좋은 약이 있다하면 달려가서 간청해 달여 드리곤 했지만 역시 신통치가 않았다. 부모의 병은 날로 깊어가 차도는 없는데 양식마저 떨어져 오누이가 바가지를 들고 오늘은 남목(南牧)으로 내일은 미개(尾浦)로 다니며 밥을 얻어다가 부모를 공양해야만 했다.

 병상에 있는 내외는 병도 낫지 않고 아이들을 밥 빌어먹는 거지로 만들어 버렸으니 몇 번인가 둘 다 죽을 생각까지했으나, 남은 아이들이 부모 없는 고아가 돼 험한 세상을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어느 날 오누이가 대편(大便)으로 가서 밥을 얻어 와서는 물에 데워 병석에 있는 부모에게 드리고 나서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차가와진 손을 녹이고 있었다. 그 때 사립문 밖에서 요령소리가 나더니 스님이 찾아와서 동냥을 구했다.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 아이들은 따뜻한 물 한 대접을 드리며 눈물만 흘렸다. 물을 다 마신 스님은 부모님 병에는 산삼이 제일 좋으니 산에 가보라고만 말하고는 사립문을 나서서 가버렸다. 오누이는 곧장 감나무 골을 지나 마골산(麻骨山)에 올라갔으나 때마침 엄동설한에 온 산이 눈에 덮여 산삼이 어디 있는지 알리가 만무했다. 지친 오누이가 바람을 피해 큰 바위 밑으로 가니 그 곳은 이상하게도 눈이 녹아있고 더운 김까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큰 무 같은 것이 여러 포기 있는데 겨울인데도 잎이 생생했다. 집에 먹을 것이라고는 없었으므로 "이것 이라도 캐서 부모님에게 삶아드리자"며 뽑아 와서는 삶아 드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몇 달을 두고 누워있던 부모가 그 무 같은 것을 먹고는 툭툭 털며 병석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가 아이들을 앞세우고 그 바위를 찾아갔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착하디착한 오누이를 하늘이 도와 산삼을 캐게 했던 것이다. 이일로 그 곳을 삼밭골(蔘田谷)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삼밭골이긴 하나 마전곡(麻田谷)이로 표기하고 있다. 이곳에는 지금 현대중학교와 현대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생활고를 못이긴 어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동반 자살하고 있다. 아무리 동물적인 보호본능이라 해도 삶을 갈망하는 아이들의 목숨을 강압적으로 빼앗는 것은 비이성적 폭력이고 살인행위다. 삼밭골의 부부처럼 돌보아주는 이 없는 험한 세상에 차마 자식들을 남겨둘 수 없어 죽지도 못하는 것이 진정한 부모의 마음이다. 그 자식들도 부모에 대한 효성으로 새 삶의 길을 열었고, 오늘날에도 부모의 도움 없이 사회안전망의 미비나 각박한 세상인심을 탓하지 않고 훌륭히 삶을 꾸려나가는 소년소녀 가장들이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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