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새로운 언어 배우기 위해
무작정 시작한 독일어 공부
獨 대학 연구원으로 제2인생까지

▲ 김상곤 전 울산시 감사관

퇴직 후에 시작한 것이 외국어를 배우는 일이었다. 이미 경험한 것이 아닌 전혀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싶었다. 독일어를 배우기로 했다. 철학자 니체의 저작을 원전으로 읽을 수 있다는 희망이 나를 부추겼다. 독어를 배워본 사람들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럴 시간과 의욕이 있으면 좀 더 쉬운 취미를 찾으라고 충고했다. 새로운 악기를 배우거나 대중적인 운동종목을 하나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이에 어울리는 일이라는 판단이었다. 적절한 충고이기는 했으나 오랜 직장 생활 끝에 얻은 이 자유로운 시간을 좀 더 농도 있게 채우고 싶은 바람을 막지는 못했다.

울산에서 독일어를 배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초보자를 이끌어 줄 학원이나 교육기관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중에 나와 있는 교재를 몽땅 사서 무조건 읽어 가는 것이었다. 외국어를 배우는 가장 무지한 방법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도움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나왔다.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한 울산대 교수님 한 분이 나의 이야기를 듣고 독일어를 지도해 주시겠다고 나섰다. 재능기부 차원의 자원봉사였다. 기본적인 바탕도 없이 철학교수님으로부터 독일어를 배우는 것은 민망한 일이었으나 부족한 부분은 배우고 싶은 의지로 대신했다. 선생님도 이처럼 나이 든 학생을 가르쳐 본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물론 사람들이 염려한 바와 같이 외국어를 새로 배우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가 아닌가 하는 자괴감으로 시달린 적도 있었다. 괜히 시작했다는 생각은 복잡한 독일어 문법을 더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선생님은 늙은 제자의 이러한 심정을 알아차리고 새로운 제안을 했다. 소설을 한번 읽어 보자는 것이었다. 가당찮은 이야기였다. 서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달리기 연습을 해 보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따라가기 어려운 공부 해보기나 하자고 했다. 그 때 선택한 책이 이미륵 선생의 “압록강은 흐른다.”였다. 서너 시간이 걸려 한 페이지를 겨우 해독했다. 소위 밑도 끝도 없는 공부였다. 물론 폭염을 견디게 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사전의 맨 마지막에서야 나오는 표현 방법을 겨우 찾아서 마침내 한 구절을 제대로 해독하였을 때의 희열은 예상하지 못한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어느 순간엔가 책의 내용에도 관심을 가질 만큼 해독능력이 향상 되면서 어쩌면 처음 시작할 때 꾸었던 꿈을 실현할 수 도 있겠다는 막연한 자신감을 가져보기도 했다.

이미륵 선생의 자전적인 이야기인 이 책은 100년 전 우리나라의 운명을 한 가족사를 통해서 잔잔하게 풀어내고 있다. 또 이 책은 독일어로 쓰여 져서 독일에서 출판, 독일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정확히 100년 전 경성의전 학생으로 삼일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일경을 피해 다니다 결국 독일로 망명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고 나서 한 동안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조국과 가족을 등지고 중국을 거쳐 유럽으로 향하는 20대 초반의 어린 학생의 모습이 한 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특히 홀어머니와 작별하는 장면은 아직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엄마는 걱정하지 마라, 네가 올 때 까지 기다릴 것이다. 설사 다시 이 어미를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라. 너는 지금까지 나에게 많은 기쁨을 주었다.” 이미륵은 홀어머니를 다시 보지 못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천재의 삶은 읽는 이의 감성을 자극했다.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니체를 한번 읽어 보고자 시작한 외국어 공부가 새로운 꿈으로 연결되었다. 독일에서 독일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젊은 지도 교수님이 꿈의 진정성을 믿어주었다. 그 때부터 꿈은 구체성을 띠고 스스로의 길을 실현해 갔다. 젊은 교수의 도움을 받아 보낸 많은 메일에 대한 답장 속에는 독일로 오라는 초청장도 함께 들어 있었다. 만하임 대학의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초청해 주었다. 퇴직 후에 시작한 꿈은 이렇게 작은 결실을 맺었다. 꿈을 꾸고 현실을 바꾸어 나가는 것은 젊은이들만의 몫은 아닌 것 같다. 퇴직을 하고나면 지력이 떨어지고 체력이 뒷받침 되지 않아 새로운 꿈을 꾸기 어렵다고 흔히 말한다. 핑계인지도 모른다.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오는 압박이 적은 이 때가 꿈을 실현할 적기인지도 모른다. 김상곤 전 울산시 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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