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4)

▲ 낡고 지저분한 매트를 깔아놓아 강을 향해 드러누워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해놓은 카페 유토피아.

루앙프라방 강변에서 만난
세계적 명성의 카페 유토피아

특별할 것 없는 강변풍광에도
한가롭게 하는 공간의 힘 체감

좋은 건축은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
건축적 장치가 때론 삶 구속하기도
장소·사회·인간을 먼저 고려해야

루앙프라방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시이다. 유네스코는 등재기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루앙프라방(Luang Prabang)은 전통 건축 및 라오 족의 도시 구조와 19세기~20세기 유럽의 식민 통치자들이 세운 건축의 융합을 보여 주는 뛰어난 사례이다. 이곳에는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많으며, 독특하고 놀라울 만큼 잘 보존된 도시 경관은 서로 다른 두 문화 전통의 융합 과정의 핵심단계를 보여 주고 있다.’

라오스인들은 이러한 설명을 납득할 수 있을까? 서구식민지배의 수치스러운 역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배경이라니…. 민족주의적 입장에서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유럽인들은 정체성이 넘치던 역사도시에 마음대로 땅을 차지하고는 자신들의 건축양식을 이식했다. 그것은 문명의 우월함과 지배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표현이었으리라. 서구인들의 입장에서는 자랑스러운 역사의 영광으로서 길이 보존되어야할 유적이라 할 만하다.

건축은 사회적, 장소적 의미와 관계없이 건축자체로서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그들은 도시의 전통과 정체성을 파괴하면서 ‘문화의 융합’이라고 포장했다. 파리 개선문 앞거리에 한옥 수십 채를 지어놓고 문화의 융합이라고 우기면 프랑스인들은 수긍할 것인가? 일본 천황궁 정문을 헐어내고 네오클래식 양식의 한국 대사관을 짓는다면 일본인들은 ‘근대건축의 걸작품’이라며 자손만대 보존하자고 주장했을까?

중심가로는 완전히 식민주의양식에 점령된 듯하다. 두툼한 벽돌 벽과 아치 창, 1층에는 아케이드, 그리고 경사지붕으로 덮은 소위 ‘프랑스 식민양식(french colonial)’들이 나폴레옹 군대처럼 대로 양편에 줄지어 있다. 드물게 라오스 민속건축들도 보이지만 민속풍이 가미된 절충식 건물들이 주류를 이룬다.

순수한 콜로니알 양식은 이곳 기후에도, 경제적으로도 적합하지 않다. 벽돌 벽체는 너무 두껍고, 창호는 적어 열기가 축적되고 쉽게 나가지도 않는다. 특히 1층은 덥고 습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상가들은 1층에 처마나 아케이드를 두어 그늘진 공간을 마련한다. 2층에도 베란다를 두는 식으로 절충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식민주의 건축이 남아있는 동남아의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동남아의 민속건축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들의 전통건축들도 목조로 만든 2층의 고상건축이다. 1층은 벽체 없이 기둥만 두어 가축사육 공간이나 작업공간으로 사용하고, 2층은 생활공간이 된다. 8개월이나 지속되는 우기에 젖은 땅에서 생활하기는 어렵다. 2층의 생활공간은 아래, 위로 환기와 통풍이 가능하여 무더운 여름에 견딜 수 있다. 얇은 벽은 나무판자나 대나무로 엮어 세우는데 경제적이고 환기와 채광이 가능하다.

루앙프라방의 강변에서 민속건축의 지속적 가치를 만날 수 있다. 특별히 강변풍광이 아름답기 때문은 아니다. 물빛도 탁하고, 백사장이 고운 것도 아니며, 강줄기나 산세가 절경이라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경관을 자본으로 하는 건축들이 저마다 강변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이중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한 카페를 찾아간다.

주택가 좁은 골목사이를 헤매다가 간신히 찾은 카페는 남태평양 휴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트로피칼(tropical) 카페에 불과하다. 세련된 건축과 개성미 넘치는 실내 장식, 스펙터클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시원하게 전개되는 전망을 기대했다면 크게 실망할 것이다. 삐꺽거리는 대나무 바닥과 구부러진 자연목 기둥, 얼기설기 엮은 초가지붕이 그야말로 시골 원두막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신발 벗고 올라선 바닥에는 의자도 탁자도 없다. 낡고 지저분한 매트만 강을 향해 깔아 놓았다. 일단 들어서면 매트에 누울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손님의 대부분은 서양인들인데, 그들의 행태는 더 가관이다. 누워 자거나,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거나, 멍 때리거나 각양각색이다. 남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든지 구속되지 않는다. 그들은 매일같이 누군가 계획한대로 보고, 듣고, 행동해야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이곳은 사람을 한가롭게 만드는 공간이다. 특별히 볼 것도 할 짓도 없으니 시간은 천천히 흐르게 마련. 목적 없이 빈둥대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잘 기획된 건축적 장치는 오히려 행위를 일정한 방향으로 구속하기 마련이다. 나른한 강변 풍경과 시원한 바람, 서늘한 그늘, 그리고 편하게 드러누울 수 있는 곳이면 족하다. 카페의 이름처럼 ‘유토피아’가 아닌가.

좋은 건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연코 그것은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시대와 장소, 그리고 사회에 따라 이상향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좋은 건축이란 궁극적으로 그 시대와 장소와 사회가 꿈꾸는 이상향의 모습을 실현한 것이다. 그것은 건축적 장치를 넘어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장소의 환경이며, 연출이어야 한다.

우리시대의 많은 사람은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을 꿈꾸곤 했다, 그 집은 저 푸른 초원 위에 있거나 그림 같은 집이어서 좋은 것이 아니다. 바로 ‘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좋은 집이 된다. 어떤 집을 지을 것인가를 궁구하기에 앞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할 때 유토피아에 가까워지는 법이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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