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고 짧게’에서 ‘가늘고 길게’로
정책과 제도 변화, 문화격차 해소
‘한방’ 없어도 행복한 삶 만들어야

▲ 정명숙 논설실장

‘굵고 짧게.’ 많은 청춘들의 바람이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삶은 언제나 굵고 짧았다. 찬란하고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삶만이 거룩한 것으로 평가됐다. 시대가 그랬다. 굵게 살자면 짧게 살아야 했다. 굴곡 많은 역사에서 작은 승리라도 얻으려면 온몸과 마음을 던지지 않고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간혹 ‘굵고 길게’ 산 사람도 없지 않았을 터이지만 ‘굵고 짧게’라는 단어가 주는 강렬함에 매료된 듯 짧은 인생들만 부각됐다. 그러니 ‘가늘고 긴’ 인생은 모두 찌질함으로 매도됐다.

고도성장·압축성장으로 요약되는 산업시대로 접어들면서 ‘굵고 짧게’라는 DNA는 더욱 강렬하게 작동됐다. 이 작은 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일군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물질적 유혹에 선의(善意)는 한계가 드러났다. 공동체에 대한 희생을 바탕으로 하던 ‘굵고 짧게’는 개인주의적 ‘한방(한탕주의)’으로 왜곡되면서 우리 사회를 물질중심으로 몰아갔다. 순식간에 크게 얻는 ‘한방’이 예사로워졌다.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는 그렇게 세뇌된 채 50~60년 동안의 산업시대를 살아왔다. ‘차근차근’ ‘성실하게’ ‘점진적’이라는 단어들은 실패의 변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세상은 바뀌고 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칠 국가적 위기도 사라졌고, ‘한방’이 가능했던 다량생산의 산업시대도 지났다. 더구나 인간 수명은 크게 늘어 백세시대다. 평범한 우리들도 이제 ‘가늘고 길게’ 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가늘고 길게 사는 것도 노력없이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시대적 도전 앞에 우리는 놓여 있다.

유감스럽게도 ‘수명연장’은 ‘성장정체’와 손을 잡고 찾아왔다. 굵고 짧게 사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과 마찬가지로 고도성장의 한계도 극복하기 어렵다. 경험해보지 못한 위기라고들 하지만 엄밀히 보면 예견된 성장정체다. ‘한방’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가늘고 길게 사는 법을 배우라는 시대적 요구가 이미 오래전 시작됐음에도 애써 외면해온 것이다. 사고의 전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책과 제도의 변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사고의 전환은 어렵다. 스스로 욕망을 버리기도 어렵거니와 삶의 태도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게 벌고 적게 쓰면서도 만족스럽고 행복한 문화국가, 문화도시가 될 때 비로소 사고의 전환이 가능해진다.

때마침 올해 국민소득 3만달러에 진입한다는 발표도 나왔다. 국민소득 3만달러는 완연한 선진국의 지표다. 더 이상 아파트 평수나 차의 크기로 중산층을 가늠해서는 안 되는 선진국이 된 것이다. 악기를 다룰 수 있는지, 스포츠를 즐기는지, 불법과 부정에 저항하는지,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있는지, 선진국들에서 말하는 중산층의 기준이다. 문재인 정부나 송철호 시장의 탄생은 이런 시대적 소명에 대한 유권자의 요청이다. ‘가늘고 길게’ 살아야 하는 작은 삶들을 살뜰하게 챙길 수 있는 정부가 필요하다는 무의식의 반응이다. 서울사람들만이 아니라 내가 사는 울산에서도 문화적 삶을 즐기면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도록 해주는 정치를 원했던 것이다.

걸어서 10분 이내에 도서관이 있고, 휴일엔 부담없이 공연과 영화를 볼 수 있고,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아이들이 안심하고 뛰놀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신뢰할 수 있는 공교육 가능한 학교가 있다면 서울과 지방을 따질 이유가 없어진다. 문화격차 해소를 통한 문화적 균형발전이 ‘가늘고 길게’ 살아야 하는 미래사회를 위한 국가적 생존전략인 것이다. 정명숙 논설실장 ulsan1@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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