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영 울산청소년의회 준비위원 울산외국어고등학교 1학년

우리나라에서 선거권은 만 19세 이상의 성인에게만 보장된다. 대한민국은 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19세로 투표권을 제한하는 국가다. 우리나라에서 청소년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사회적 의사결정구조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의견을 내고자 하면, 학교 내에서는 학업을 이유로, 교외에서는 판단능력이 미숙하다는 이유로 ‘묵살’당한다. 이같은 여론으로 인해,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참정권은 전무한 상태나 마찬가지다.

청소년 참정권에 대한 찬반토론을 실시할 때면, 토론이라는 명목 하에 청소년에 대한 혐오발언은 끊임이 없다. 성인뿐 아니라, 같은 청소년들조차도 우려하는 게 선거연령 하향에 대한 문제다.

주변인들과 청소년 참정권에 대한 얘기를 해본 적이 있다. 대부분 찬성하는 의견이 많았지만, 반대하는 사람은 보통 정치를 잘 모르는 청소년들이 ‘올바른’ ‘뽑을 만한’ 사람을 어떻게 알고 뽑느냐는 것을 우려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정치를 가르치자는 얘기가 나오면, 공교육이 정치판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점이나 학생들이 교사의 정치적 성향에 선동될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부정적인 의견이 많이 나왔었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은 언제 ‘진짜 정치’를 알고 실현할 수 있는가. 내가 청소년의회 준비의원으로 활동할 때도 사람들이 우려를 많이 했다. 아직 정치를 잘 모르는 학생이 어른의 정치적 성향에 물드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내 의지로 청소년의회 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학교 안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비교적 한정되어 있었고 그에 대해 부족함을 느꼈다. 그래서 청소년의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정치에 대해 해박하지도 않고 누구보다 전문적인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물음을 던질 수 있다. 학교의 학생회, 청소년참여위원회 등 여럿이 있는데 왜 굳이 ‘청소년 의회’여야 하는가. 이에 대한 적절한 답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주변환경이 적절히 조성돼 있다든지,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다든지 이런 배경의 유무 없이도 청소년이라는 계층에 속한 모두에게 기회를 제공해야하지 않을까. 그래서 국민이라면 의회의 존재를 누구나 알듯이, 접근성에 구애받지 않는 상징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선동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부추겨 어떤 일이나 행동에 나서도록 함’을 뜻한다. 선동의 원인은 무엇일까. ‘잘 모르기 때문’이다. 선동되지 않기 위해서는 알아야 하고, 배워나가야 한다. 배움은 끝이 없다고들 한다. 앎으로 따지자면 성숙한 사람이 있을까. 주변 사람들에게 성숙하다고 인정받게 될 때는 언제일까. 성인이기 때문에 성인이 됐을 때야 비로소 성숙함을 인정받는 것일까.

그리고 미숙한 존재가 영향을 받을까 우려한다면, 배워가는 과정 속에서 주변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있는지 질문을 하고 싶다. 민주주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순환의 고리를 안겨주는 것이다.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그 영향력에 대하여 인지할 수 있도록 하며, 스스로 책임감을 갖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에는 이와 같은 일이 여성에게, 흑인에게 일어났다. 미숙하다는 이유로 참정권을 주지 않았다. 역사가 물었고 끊임없이 답해왔다. 신체적인, 물리적인 힘이 사회의 권력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청소년이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드러낼 수 있도록, 의견이 힘없는 주장에 그치지 않고 정책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청소년 의회’의 존재가 필요하다.

김주영 울산청소년의회 준비위원 울산외국어고등학교 1학년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