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주환 성균관 부관장·전 구강서원 이사장

올해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이다. 같은 해 일어난 ‘파리장서’는 서울 3·1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던 전국의 유림들이 일으킨 독립운동이다. 민족대표 33명의 명의로 발표된 서울의 3·1운동 독립선언서에는 천도교·기독교·불교 대표들이 참여했으나 조선조 500여 년 동안 국가 운영의 뼈대였던 유교대표들이 빠졌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유교는 충군애족사상을 중시했기에 그 만큼 충격이 더 컸다.

이런 자각으로 일어난 것이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등 유림대표들이 중심이 되었던 ‘파리장서’였다. 심산은 이후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왜경에 쫓기면서도 군자금 모금을 위해 애를 썼다. 울산도 여러 차례 방문해 많은 유림들을 만났다. 파리장서에 동참한 이규린은 물론이고, 남창 3·1운동의 주역으로 울산을 대표하는 유림이었던 이재락의 장남 동립은 사위로 맞았다. 범서읍 입암에 살면서 심산과 함께 군자금 모금에 앞장섰던 유학자 손후익과도 인연을 맺고 그의 딸 응교를 며느리로 맞기도 했다.

도덕과 윤리 그리고 예절을 생명처럼 존중해 온 울산유림들이 올해 ‘파리장서 100주년‘을 맞아 많은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4월16일에는 성균관 명륜당과 234개 향교명륜당에서 전국 동시에 추모행사와 파리장서를 낭독, 만세삼창과 학술토론 및 전시회가 열린다. 울산향교의 이동필 전교를 비롯한 울산유림들도 이에 동참할 예정이다. 울산유림은 앞으로 합리주의와 중용사상을 중시해 온 유림정신을 울산시민들에게 알려 대동세계를 지향하는 유교학풍을 펼치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더불어 이번 기회에 울산보훈처에 건의할 일이 있다. 울산의 유학자 손후익 집안은 부친 손진수와 딸 응교까지 3대가 독립운동을 펼쳤다. 손진수는 심산이 언양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했을 때 입암 집으로 옮겨 간호했다. 유림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심산을 도와 군자금을 모금하다 왜경에 체포돼 대구경찰서에서 옥중생활까지 했다.

심산을 직접 간호했던 딸 응교는 심산의 둘째 아들 찬기와 혼인했지만 결혼 후 찬기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간 후 돌아오지 않아 평생을 혼자 외롭게 살아야 했다. 그는 남편이 없는 중에도 시아버지 심산을 모셨고 심산이 백양사에 머물 때는 거처를 울산으로 옮겨 와 심산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다행히 이처럼 손씨 3대의 독립운동 발자취가 남아 있는 입암 집은 그동안 이웃에 살고 있는 이수원 씨가 구입한 후 지금까지 잘 관리 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입암 사람들조차 이 집이 이처럼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집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함월산에 있는 백양사 역시 신라 고찰로만 알려져 있을 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심산이 머물렀던 사찰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드물다. 심산은 오랜 감옥생활 이후 울산 백양사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만났다. 이 때 전국에서 많은 유림들이 그를 찾아와 위로와 격려를 했다. 심산은 환갑도 백양사에서 맞았는데 이 때 전국유림들이 몰려 와 환갑잔치를 해 주려고 하자 “나라를 잃은 백성이 환갑은 무슨 환갑이냐”면서 사양했다. 심산은 백양사에 머무는 동안 많은 한시를 남겼는데 이 시속에는 망국민의 슬픔이 넘쳐나고 있다.

최근 들어 정부는 항일운동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이런 유적을 개방 해 청소년을 위한 독립운동의 교육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입암 손후익 집은 항일운동의 좋은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 백양사 역시 독립운동가의 거처였다는 사실을 신도는 물론 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울산지역 보훈문화의 확산을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울산보훈지청이 앞장 서 이들 건축물에 대해 문화재 지정을 검토하고 이에 앞서 독립운동을 알리는 간판이라도 세워야 할 것이다.

엄주환 성균관 부관장·전 구강서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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