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학성이씨 주도로 남창장날 거사

고종의 장례에 참여했던

이재락, 문중에 3·1운동 전해

만세운동으로 8명 옥고치러

온산서도 도모…밀고로 무산

▲ 지난해 4월8일 열린 제13회 남창기미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
백년 전(1919년) 4월8일 울산군 온양읍 남창리에서는 한학자 이용중 문하의 유림과 학성이씨 문중의 주도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웅촌면 석천리에 살고있던 학성이씨 문중의 이재락은 서울에서 고종의 인산에 참여했다가 3·1운동을 목격했다.

울산으로 돌아온 이재락은 문중 사람들에게 서울에서 보고들은 3·1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이수락, 이희계, 이쾌덕, 이용락은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하고 남창 장날인 4월8일을 거사일로 정한 뒤 준비작업을 진행했다.

거사 당일 장터에 장꾼들이 모이자 주동자들이 태극기를 나눠주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고 일본 군경은 이일락, 이희례, 이쾌덕, 이수락을 주동자로 검거했다.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주도했던 이용락은 검거를 피해 잠시 몸을 숨겼다가 독립만세라고 쓴 광목을 매단 장대를 흔들며 시위를 다시 이끌었다. 고기룡이 그것을 받아들어 앞장 서서 시위 군중을 지휘하기도 했다. 경찰은 고기령을 구타하고 연행한 뒤 발포했고 이에 시위 군중들은 흩어졌다.

일제가 남긴 ‘재판판결문’ 중에는 당시 고기룡(42세), 이용락(21세)에게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어로 쓰여 진 판결문에 따르면 ‘이들이 대한독립 이라고 크게 쓴 깃발을 준비해 1919년 4월8일 열린 경남 울산군 온양면 남창리 시장에 모인 군중 속에서 오후 4시경 함께 이를 앞세우고 위세를 보이며 솔선하여 한국독립만세라 외쳐 불렀다. 군중을 선도해 약 50여 명의 호응자를 얻어 조선독립의 희망을 달성할 목적으로 이를 다수의 조선인과 함께 만세를 불러 치안을 방해했다’고 돼있다.

이처럼 남창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검거 구속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1년형과 6개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사람이 8명이었다.

다만 만세운동으로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온산에서도 만세 준비가 있었다. 신형석 울산대곡박물관장은 ‘4월, 울산의 의로운 함성을 다시 생각한다’ 제하의 칼럼에서 100년 전 온산읍 당월리에서의 일을 이렇게 알리고 있다. ‘김인석은 당시 울산공립보통학교(현 울산초등학교) 학생으로, 13세에 불과했다. 그는 울산 여러 곳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4월15일을 의거일로 정해 태극기를 만들어 나누어 주는 등 준비를 했다. 그러나 온산면장의 밀고로 일경에 붙집혀 불구가 될 정도로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그 후유증으로 요절했다. 울산 만세운동에서 소년 김인석 역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홍영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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