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식 삼일여고 교사

그녀의 기억은 어느덧 눈앞의 아들을 몰라볼 정도로 점점 흐릿해져갔지만 눈 오는 날, 아들이 미끄러질까봐 골목길을 쓸던 순간은 또렷했다. “눈 쓸어요. 눈이 오잖아요. 우리 아들이 다리가 불편해서 학교 가야 될 텐데 눈이 오면 미끄러워서.” 그녀가 그렇게 말한 순간, 그녀의 아들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뚝뚝, 눈물방울이 눈 쌓인 요양원 마당 위로 떨어졌다. “아들은 몰라요. 그거.” “몰라도 돼요. 우리 아들만 안 미끄러지면 돼요.” 아들은 떨어진 눈물방울을 계속 훔쳐내며, 그러면서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들은 평생 모르고 있었다. “엄마였어. 평생 내 앞의 눈을 쓸어준 게 엄마였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어머니. 어릴 적 사고를 당해 다리 한 쪽을 의족에 의지하며 살아온 중년의 아들.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12부작의 짧은 드라마로 끝나버렸지만 나는 이 드라마를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드라마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시계를 갖고 있는 그녀의 따뜻한 로맨스로 시작한다. 사고를 당한 아빠를 되살리기 위해 시계를 돌리고 또 돌리다가(알츠하이머의 기억 속에서 그 아들은 그녀의 아빠가 되었다. 사실 수천 번이라도 시계를 돌려 구하고 싶었던 사람은 사고로 다리를 잃은 그녀의 아들이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늙어버린 채 25살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는 모두 그녀의 꿈과 착각이었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빛났던 25살의 그녀로 살고 있던 것. 마지막에 이르러 드라마는 그토록 사랑하던 남편을 일찍 잃고, 혼자 미용실을 운영하며 다리 불편한 아들을 키워낸 그녀의 애틋한 인생사를 펼쳐낸다. 그녀는 그 기억들이 눈물이 날 만큼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녀의 기억 속은 온통 그리운 것들 투성이었다.

“난 말야. 내가 애틋해. 남들은 다 늙은 몸뚱아리 뭐 기대할 것도, 후회도, 의미 없는 인생이다 뭐가 안쓰럽냐 하겠지마는, 난 내가 안쓰러워 미치겠어. 너도 네 인생이 애틋했으면 좋겠다.” 그녀가 자신을 빗대 위로하는 그 말이 나는 두고두고 봄바람처럼 마음에 와 닿았다. 드라마의 마지막 부분.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좋은 드라마를 보고나면 좋은 사람을 만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그녀가 그랬듯 우리네 인생도 그렇게, 눈부시고 애틋해지기를. 김경식 삼일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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