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을 과장된 선거용 용어로 본
이낙연 총리의 국회 답변을 보며
현실과 괴리된 말의 부작용을 경계

▲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말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현실을 반영한다. 학문 분야는 보수적인데다 홍보에 무심해서 말이 현실에 뒤처지곤 한다. 대학시절 공대 요업공학과에 다니는 선배가 있었다. 요강이나 도자기 만드는 학과냐고 짓궂게 물었지만, 실제로는 유리나 반도체 등 전자재료를 다루는 학과였다. 나중에 무기재료공학과로 학과명을 변경한 뒤 인지도가 쑥 올라갔다.

의학 전문 과목명은 오랫동안 전통적인 이름을 고수해왔다. 신경정신과는 1982년에 뇌졸중, 파킨슨병 등 뇌의 기질적 질환을 치료하는 신경과와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정신과로 분리되었다. 정신과는 우울증, 불면증, 불안장애, 스트레스성 장애, 신경성 신체증상, 조현병 등을 치료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정신과를 정신병과로 여기고 기피한다는 것이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체중 감소나 기운 저하를 호소하며 다른 과 진료를 받다가 못 견딜 정도로 심해져야 정신과를 방문한다. 내과 의사가 정신과 진료를 권하면 어떤 환자는 화를 낸다. 이웃의 눈을 피해 불편을 무릅쓰고 다른 도시에서 진료를 받기도 한다.

이렇게 정신과의 문턱이 높아진 것은 그 이름도 한몫하였다. 게다가 뇌와 정신, 혹은 몸과 마음이 밀접한 관계라는 과학적 근거가 갈수록 늘어나서 정신만 따로 분리해 정신과라 칭하는 것도 부정확하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토론 후 회원들을 대상으로 과명 변경을 위한 투표를 하여 2011년 정신건강의학과로 바꾸었다.

과명 변경의 효과는 일시적일 뿐, 시간이 지나면 결국 의료 현실이 인식을 좌우한다. 많은 연예인들이 평소 숨기던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고백하자 일반인은 정신질환이 나약한 마음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생길 수 있다고 인식하고 치료 받을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반면 최근 수년간 인권보호를 이유로 입원치료가 어려워지자 치료 받지 못한 조현병 환자에 의한 비극적 사건이 자주 보도되면서 정신질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다시 늘고 있다.

딱딱한 학술 용어를 고집하기보다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추어 개명한 과도 있다. 임상병리과는 친근하게 진단검사의학과로 바꾸었다. 진단방사선과는 방사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에서 벗어나도록 2007년에 영상의학과로 개명하였다. 요즘 보편화된 MRI 검사, 즉 자기공명영상은 처음엔 ‘핵자기공명영상’이라고 불렸지만, ‘핵’에서 방사선이 나오는 검사라는 오해 때문에 핵을 뺀 이름으로 변경하였다.

정확하고 알기 쉬운 말은 현실을 반영하여 오해를 줄이지만, 의도적으로 현실을 과장·왜곡해서 오해를 유도하는 말도 있다. 말의 부작용이 드러날 때 빠져나오는 기술은 필수다. 지난달 이낙연 국무총리의 국회 답변이 눈길을 끈다. 201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의 ‘탈원전’ 공약은 부적절한 용어였고 과장된 표현이었다고 총리가 언급했다. 자유한국당 이종배의원이 ‘대통령이 탈원전 용어를 썼다’고 지적하자 총리는 ‘선거 때는 과장된 언어를 쓰는 것’이라고 답했다.(매일경제 2019.3.21.)

그러면 대선 당시 국민들은 탈원전을 과장된 표현으로 받아들였을까? 과장되고 부적절한 선거용 용어였다면 왜 집권 후에도 ‘탈원전’을 내세우며 그렇게 밀어붙였을까? 현 정권은 공정률 30%인 신고리 5·6호기 공사를 갑자기 중단시켰다가 큰 손실을 보고 재개하였다. 좀 더 그럴듯한 해석도 가능하다.

‘탈원전’은 원전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면서 안전을 강조하는 꽤 솔깃한 말이다. 원전 문제는 과학적·경제적으로 복잡하고 중대한 사안인데도 높은 지지율을 배경으로 제대로 된 논의 없이 단지 말이 가진 이미지와 힘만 믿고 정책을 추진해온 건 아닐까. 현실과 동떨어진 말이 그대로 정책 목표이자 추진 동력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우려스럽다. 바쁜 가운데 뉴스 제목만 훑어보는 현대인에게 자극적인 단어 선점은 영향력이 크다. 이후 원전수출, 전기요금, 미세먼지, 환경문제 등의 현실적 문제가 부각되고 ‘탈원전’에 대한 호응이 떨어지자 슬그머니 용도폐기 수순에 들어간 것 같다. 이제라도 ‘탈원전’ 고집을 누그러뜨린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정치인의 과장된 언어를 가려서 들으라는 총리의 솔직한 답변이 마음 한편에 걸린다.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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