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동은 범서면 지역으로, 1914년에 다전동·운곡동·신안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고 다전과 운곡의 이름을 따서 다운리라 했으며, 1962년 울산시에 편입되면서 동이 됐다.

 다전(茶田)은 다운동에 있는 마을로서, 신라 때부터 이곳의 자연생 차(茶)나무에서 차를 생산한 것에서 유래된 땅이름이다. 이곳의 차는 향과 맛이 뛰어나 나라에서 차 생산지로 지정하고 이곳에서 생산된 차는 궁중에 진상됐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울산에서 생산된 작설차(雀舌茶)가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으로 조정에 세공(歲貢)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지금도 다운마을의 산에는 자연산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일제시대 녹차에게 자리를 내주기까지 이 땅의 대표적인 차는 작설차였다. 단순히 "녹색"의 차라는 뜻으로 포괄적으로 호칭되는 일본인들의 녹차와는 달리 작설차는 찻잎의 모양새가 참새(雀)의 혓바닥(舌)을 닮았다는데서 유래하는 이름이다. 한편으로는 찻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우전차, 세작, 중작, 대작으로 나뉘며 곡우와 입하 사이에 찻잎의 새순이 참새 혀만한 크기일 때 따기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제조과정이 복잡해 아홉 번 쪄서 아홉 번 말려야 하는 등 잔손질이 많아 번거롭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암이나 충치를 예방하고 비만을 막는 등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하는 효과도 있다 한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중국의 차를 신라의 선덕여왕이 마시곤 했는데, 흥덕왕 3년(828)에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앗을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고 차는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제물의 하나로 사용됐다.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중국 오대(五代)의 송나라에서 성행된 연고차의 풍습이 전래되어 차 문화가 흥했으며, 팔관제 등 불교의식에 사용되기도 했다. 궁중에는 다방이 있었고 사원에는 다촌(茶村)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숭유억불 사상으로 주춤했으나, 고려 말의 마시는 잎차 문화는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졌다. 중국의 차 문화를 본 떠 다법, 다구, 차의 이름을 지었고, 다 달이기, 물 전하기의 풍습이 있었다. 우리의 생활여건에 맞도록 토착화시켜 차를 달일 물의 등급을 매기기도 했고, 차의 공덕을 칭송하며 시를 읊기도 했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또 다른 독창적인 차 문화도 있었는데, 화랑들이 야외수련에 적합하도록 창안한 다구가 있었고, 상감기법으로 남든 고려청자의 찻사발을 만들기도 했다. 또 차를 다루는 다담군사, 행로군사도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사헌부 관원들이 다시청(茶時廳)에서 차를 마시며 정사를 논하기도 했다. 이 때 다모(茶母)가 시중을 들었다 하는데, 다모는 포도청에서 오늘날의 여형사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갑오개혁 이후에는 일반 시중에도 차 마시는 풍조가 일어났는데, 일제시대에 다방, 다실, 찻집은 서울의 명물로 등장해 많은 예술인들이 출입하기도 했다.

 다운동의 옛 야생차밭을 되살리려는 "다전차밭" 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문명이라는 이름 하에 인스턴트 식음료와 즉흥적 삶에 익숙한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은은한 차 향기와 만나는 시간을 통해 진정한 문화적 풍요로움과 참된 평화로움을 경험하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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