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사무실은 농지개량조합이었다. 농개조의 넓은 마당은 우리에게 대단한 놀이터였다. 우리 뿐만 아니라 매미에게도 대단한 놀이터였던 것같다.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는 여름이면 매미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단지 좀 시끄러울 뿐 인간에게는 아무런 해를 주지 않는 매미는 악동들로부터 엄청난 수난을 겪었다. 더없이 좋은 장난감이었던 것이다. 새까만 색깔의 매미를 한마리 잡으면 날개에 실을 매달아 마치 바람개비 돌리듯 들고 뛰어다녔다. 야간 초록빛이 나면서 채 날지도 못하는 어린 매미를 잡으면 나는 연습을 시키느라 못살게 굴었다.

 그보다 더 신났던 것은 굼벵이를 잡는 일이었다. 매미가 되기 전의 유충단계인 굼벵이는 땅속에 살았다. 농개조 마당에 숭숭 뚫린 구멍은 모두 굼벵이 집이었다. 꼭 손가락 굵기만한 구멍에 손가락을 속 잡아넣으면 굼벵이가 다리를 오므려 손가락을 붙잡았다. 잡는 느낌이 나면 손가락을 살짝 빼올리는 것으로 굼벵이 잡는 일은 끝난다.

 동작이 굼뜨는 사람을 "굼벵이 같다"고 하는데 굼벵이는 정말 느리다. 악동들은 굼벵이가 가장 싫어할만한 것을 어떻게 그렇게 용케도 알아내는지, 굼벵이 여러마리를 나란히 줄을 세워놓고 달리기 시키는 놀이를 주로 했다. 굴속에만 5~17년을 웅크리고 있다가 매미가 되어서는 겨우 일주일을 살다가 생을 마친다니 그들에게 달리는 일은 얼마나 고달팠을까. 생김새 또한 그지없이 멍청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그래도 벌렌데, 어린아이들조차도 무서워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같다.

 추석날 저녁 태풍 예보가 있을 때만 해도 북한이 지었다는 "매미"라는 이름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너무나 친근한 이름에다 여름도 다 지났고, 굼벵이라는 출신도 있으니 그 위력에 대해서는 대수롭잖겠다고 섣부른 "점"을 치고는 정전이 되어도, 우르르 쾅쾅 천둥 번개가 쳐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밀린 잠을 보충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이 되고보니 세상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악동들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해 버둥대던 그 매미도, 굼벵이도 아니었다. 대형크레인을 넘어뜨리고, 다리를 끊어버리고, 거대한 선박도, 집도 날려버렸다. 배과수원에는 배가 대부분 떨어져 버렸다. 나무에 달려있는 배가 하도 몇 안되었다. 마치 배가 원래 땅에서 자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울리지 않게도-꽃이 질 때 송이째 뚝뚝 떨어져 땅에서 피는 꽃이라고도 하는-동백꽃이 떠올랐다.

 이럴 때 정부나 언론사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성금모으기다. 이번에도 예외없이 연휴를 끝내고 처음 만드는 신문에 성금모으기 "알림"을 냈다. 아울러 "낙과사주기운동"을 제안했다. 떨어진 과일을 쳐다보는 농민의 심정이 오죽할까 싶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도 못한 채 서둘러 성금모으기와 함께 나란히 사고를 실었다.

 농협측은 온전치 못한 배를 출하했다가 공연히 배의 이미지를 버려 향후 몇년동안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된다고 우려하면서 농협이 공식적으로 출하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배농가들이 판매를 안하는 것도 아닌데, 안타까웠다. 낙과라는-예를 들어 "이 배는 태풍 매미로 인해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품질이 안좋을 수도 있습니다."-스티커 하나만 만들어붙이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전문가인 그들의 의견에 따라 농협은 소비자와 개별농가를 연결해주는 것으로 동참하기로 했다.

 배농가가 많이 소재하고 있는 울주군은 직원과 주민들을 독려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울산시는 낙과수매라는 보다 "크고 확실한" 방법으로 동참했다.

 그러나 아무리 돈으로 보상이 된다고 해도 멀쩡한 배를 단지 낙과라는 이유로 판매를 못한다면 농부의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영 못먹는 배라면 버려야 하겠지만 15㎏ 1상자에 1만원주고 산 낙과는 우선 보기에도 상처하나 없이 멀쩡하고, 먹어보니 당도도 높고 수분도 많았다. 오히려 서민들에게는 싼 값에 실컷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랄까. 낙과사주기운동이 대대적으로 번져 울산지역의 낙과가 모두 판매 또는 수매가 되어서 농민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jms@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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