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식 삼일여고 교사

대학 시절. 대학 도서관에 파묻혀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친구들과의 대화는 겉돌기 십상이고, 뒤돌아서는 순간부터 뼛속까지 공허할 때가 많았던 그 때, 책 속엔 길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열렬한 공감, 혹은 그로 인한 기쁨이 가득했으니까. 넓고 커다란 창밖으로 키 큰 나무들이 엷게 하늘을 가리고, 낡고 습한 책 냄새가 엷게 밴 늦지 않은 오후 무렵의 휴일 도서관은 불안감에, 때론 외로움에 시달리던 미숙한 청춘에겐 안전하고도 믿음직한 유일한 공간이 되었다.

요즘 틀에 박힌 여름휴가를 거부하는 실속파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피서법이 있다고 한다. 바로 ‘북캉스’이다. 북(Book)과 바캉스(Vacance)의 결합어로 독서를 즐기며 휴가를 보내는 것을 뜻하는 북캉스. 알고 보면 꽤 유래가 깊다고 한다. 19세기 영국의 관리들은 3년에 한 번 꼴로 휴가 기간에 셰익스피어 작품 5편을 읽고 감상문을 제출하는 ‘셰익스피어 여행’을 떠났고, 조선 시대 세종대왕 역시 집현전 학자들에게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독서 휴가를 제공했다고 한다. 마음에 청량감을 주는 책들과 함께 스트레스를 해소하면서 머리를 식히라는 배려였다.

누구나 한 번씩 꿈꾸는 혼자만의 여행. 홀가분하게 빡빡한 일정 없이 떠나는, 하나의 풍경이 익숙해질 때까지 머물고, 어느 날 아침 눈을 떠, 문득 떠나고 싶어지면 다시 무작정 떠나고, 그리고 문득 나의 그 평범하고 지루했던 일상이 새록새록 그리워지면 뒤를 돌아서 곧장 돌아오면 되는 그런 여행. 하지만 그렇게 훌쩍 떠나고 싶지만 그렇게 녹록치 않은 현실은, 해야 할 일이 있고, 돌봐야 할 가족이 있고,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들이 있다. 그럴 때 우리가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책은 아무 때나 떠날 수 있는 여행이고, 언제나 시작할 수 있는 대화’라고 했다. 아직 휴가를 떠나지 않았다면 한 권의 책과 함께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는 카페에 앉아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며, 달콤한 팥빙수를 한 숟가락씩 입안에 스르르 녹여가며, 읽는 책 한 권은 우리에게 어떤 휴가에도 뒤지지 않는 자유를 선사할 것 같다.)

‘어떤 곳에 가면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이 된다.’고 한다. 나는 어떤 책이 되고 싶은 걸까? 어떤 책으로 남고 싶은 걸까? 아마도, 오래도록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소나기’ 같은 산골 소년 소녀의 이루어지지 않은, 그렇게 잠시 서로에게 보랏빛 흙물을 물들인 가슴 먹먹한 단편소설이, 인간의 냄새, 인간의 마음이 풀풀 담긴, 누군가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한편의 수채화처럼 그런 담백한 수필이 될 것 같기도 했지만, 나이가 먹어 갈수록 나는 시가 좋다. 소설 한 권을 길게 읽었을 때 느꼈던 감정보다도 더 깊은 떨림을 준, 짧지만 아주 강렬한, 그 옛날 대학 도서관에서 누렸던 열렬한 공감과 낯선 기쁨처럼. 이를테면,

‘당신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가을, 함민복)

아마도 이런 맘 아니었을까? 모든 그리움의 순간, 나는 그 여름날 밤 책을 읽었다. ‘당신 생각을 켜 둔 채’ 로. 김경식 삼일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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