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일걸 정치학박사·한국간도학회 회장

지난 8월22일 국회에서 이상헌 의원 주최로 박상진 대한광복회 총사령의 공적 재조명의 토론회가 개최됐다.

토론 제목이 ‘울산 독립운동가 박상진 의사’였다. 그 동안 학계·정치계는 박상진 총사령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박상진이 조직한 대한광복회가 친일부호인 장승원을 처단했던 일로 인해 서훈이 낮게 평가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여하튼 늦었지만 박상진 총사령의 서훈 승급 운동은 반가운 소식이라 참석했지만 토론회 제목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제목대로라면 박상진 총사령은 울산지역의 독립운동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박상진 총사령은 전 재산을 국권회복을 위해 내놓았으며, 목숨마저 국가에 바친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위국수명(危國授命) 정신을 실천하신 분이다. 오히려 토론회가 박상진의 명예를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저어되기 때문이다.

박상진은 울산을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다. 1910년대 국권회복을 위한 무장투쟁의 선구자이자 항일투사였으며, 중국의 혁명가 손문과 국권회복의 방략을 제안하고 의논했던 동아사아의 지도자였다. 항일의병장 신돌석과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을 의형제로 맺는 등 호협한 인물이었다. 1915년 조직한 대한광복회는 전국 8도 지부장과 만주지역 부사령을 임명하는 등 국내·외의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국내 항일단체로는 유일했다.

이번 토론회의 문제점은, 박상진이 1910년대를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항일무력투쟁가로서의 자리매김에 실패했다. 또한 식민사관의 잔재들인 ‘독립’이라는 용어가 난무하여 박상진의 ‘항일투쟁’ 업적을 감퇴시켰다.

이와같이 ‘대한광복회’가 벌인 군자금 확보 및 친일 부호 처단 등의 항일무장투쟁 활동은 3·1 항일투쟁의 매개 역할을 함과 동시에 1920년대 의열투쟁 전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박상진은 을미·정미의병에 거병하여 13도 창의대의 ‘서울탈환작전’의 ‘군사장’으로 활약했던 ‘허위’ 의병장의 수제자였다. 이듬해 체포되어 순국한 스승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 박상진이다.

박상진은 14세인 1897년 허위의 제자가 되어, 스승의 항일 의병정신을 본받아 실천했다. 스승이 정미의병에 참여하자 박상진은 군자금 오만 원과 무기까지 제공했다. 정우풍의 의암(宜庵)수기에 실린 박상진의 만사(輓詞) 마지막 구절이 “英雄十五失天眞”이다.

이 만사(輓詞)의 구절이 사실이라면, 박상진은 1904년에 ‘국운만회계획’을 스승 허위에게 고하고 이듬해 천진에서 무기를 구입했다. 따라서 박상진은 1904년인 21세부터 항일투쟁을 실천하였음이 입증된다.

박상진과 의형제였던 김좌진·신돌석의 상훈도 박상진 보다 높다.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수여받았다. 신돌석 의병장은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수여받았다. 이에 비하면 박상진의 항일투쟁 업적이 결코 이들에 뒤처지지 않는다. 당연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 받았어야 마땅하다.

한일병합조약은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어 국제법상 원천적으로 무효이며, 또한 한일기본조약 2조에 의거해도 분명 무효이다. 2010년 5월 10일 한일 지식인 200여명도 ‘한일병합조약의 원천 무효’임을 공동 선언했다.

따라서 1910년 이후 선열들이 행한 ‘항일투쟁’은 ‘독립운동’이 아닌 ‘광복투쟁’ 혹은 ‘국권회복투쟁’이었다. ‘독립’의 용어 사용의 밑바탕에는 ‘한일강제병합조약’이 합법적이라는 식민사관이 깔려있다. 그러나 한일병합조약이 무효이기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대한제국’→‘대한임시정부’→‘대한민국’으로 계승되어져, 일제의 35년 불법 점유는 당연히 무효이다.

박상진이 조직한 ‘대한광복회’의 목적이 “무력을 양성하여 국권회복”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것을 천지신명에 맹서하였다는 점을 상기할 때 ‘독립’이라는 용어 사용은 결코 타당하지 않다. 박상진의 공적을 바르게 규명하여 홍보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이일걸 정치학박사·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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