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의 실천은 바람직함이 전제돼야
차별성 모호한 또다른 국제영화제를
공약이라는 이유로만 강행해선 안돼

▲ 정준금 울산대 사회과학부 교수·행정학

공약은 선거과정에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후보들이 ‘정책 보따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보따리 속에는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서 다소 무리하고 대중영합적인 내용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또 공약은 타당성과 파급효과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단기간에 급조되는 경향이 강하다.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내용을 모두 포괄하여 집대성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짜깁기와 베끼기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중앙정부, 지방정부 할 것 없이 공약을 근거로 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그저 공약이라는 이유로 대규모 예산이 소요되거나 사회적 갈등이 예상되는 정책, 또는 불요불급한 정책들을 신중한 검토 없이 밀어붙이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울산시는 최근 국제영화제를 추진하고 있다. 이 시기에 뜬금없이 왜 국제영화제인가. 출발은 현시장의 공약이다. 울산시 홈페이지를 보면, 31개 공약, 97개 세부사업 중 74번째가 ‘국제환경영화제 개최’이다. 울산시는 이 공약의 실현을 위해 외부기관에 용역을 주어 세부사업계획을 수립하도록 하고, 몇 차례의 보고회와 자문회의를 거쳐 내년 9월에 국제영화제를 개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미 울산에는 울주군이 개최하는 세계산악영화제가 있다. 처음에는 인지도가 낮았으나 영남알프스라는 지역적 특성을 담아 나름대로 특색 있는 영화제로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전국에서는 매년 수 십 개의 영화제가 열리고 있으며, 주제도 환경, 여성, 자연 등 더 이상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영화제가 열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울산에 국제영화제를 하나 더 추가한들 문화도시 울산, 관광도시 울산에 얼마나 기여하겠는가. 더구나 울산시는 얼마 전 울산지역에 난립한 축제들을 축소·정리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가 있다. 그런데 기존 울주 세계산악영화제가 막 자리를 잡아 가는 이 시점에 굳이 공약 추진을 위해 30억이라는 적지 않은 예산을 쓰면서 새로운 국제영화제를 시행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울산시가 국제영화제를 공약이라는 이유로 당연한 듯이 정책으로 채택하고 실행하는 것은 일종의 ‘정책강제’이다. 공약은 정책의제(policy agenda)에 불과하고 이의 공식정책화 여부는 보다 심도 있는 접근과 민주적 여론 수렴 절차가 필요하다. 이런 과정을 생략한 채 국제영화제 개최를 기정사실화 하고 곧 바로 구체적인 세부사업화 작업에 돌입한 것은 기관장의 공약은 곧 정책이라는 일방적 사고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물론 공약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후보자의 공약 내용과 실천 정도를 따져보는 매니페스토(manifesto) 운동은 우리나라 선거문화의 긍정적인 변화에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공약의 실천은 공약 자체의 바람직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선거를 위해 마구잡이로 끼워 넣은 공약까지 실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울산시가 추진하는 국제영화제는 재고(再考)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이 시점에서 울산에 국제영화제가 필요한 것인지 더욱 철저하고 객관적인 기준으로 재검토하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논의는 국제영화제 개최를 전제로 하고 주로 세부사항에 대한 의견 수렴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다 근본적으로 과연 정체성도 불분명하고 차별성도 뚜렷하지 않은 국제영화제를 개최할 필요성이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국제영화제 관련 예산을 심의해야 하는 시의회는 물론, 언론과 시민단체를 포함한 시민사회에서도 이 사안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주기를 바란다.

선거운동을 위해서는 조금 무리하거나 현실성이 낮은 공약을 포함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당선 후에는 책임 있는 최고 정책결정권자로서 정책의 타당성과 실현가능성에 대한 객관적 접근을 통해 공약의 옥석을 가릴 필요가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비록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기는 했지만 후보자가 제시한 공약을 모두 정책으로 실현해도 된다는 것을 허락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약을 이유로 한 ‘정책강제’를 탈피하기 위해서 울산 국제영화제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정준금 울산대 사회과학부 교수·행정학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