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도시 울산에 자연이 준 ‘느슨’한 여백
‘느긋’한 비움으로 한국적 아름다움 만끽
있는 그대로 ‘느릿’하게 즐기고픈 태화강

▲ 정명숙 논설위원실장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이 ‘세계인이 뽑은 아름다운 개막식 2위’에 랭크됐다고 알려져 있다. 1위는 2004년 아테나 올림픽이라고 한다. 누가 언제 어떻게 조사를 했는지는 출처를 찾기가 어려우나 세계인들의 가슴에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만은 분명하다. 서울 올림픽 개막식의 압권은 ‘굴렁쇠’다. 우리 민족의 상징인 흰옷과 전통 탈을 이용한 퍼포먼스가 끝난 텅빈 잔디 운동장에 초등학교 1학년생이 천천히 굴렁쇠를 굴리며 뛰어가는 모습은 언제 떠올려도 가슴이 찡하다. 요즘처럼 최첨단 과학기술을 통해 감탄을 자아내게 한 것이 아니라 ‘비움’과 ‘여백’이라는 한국의 독창적 아름다움으로 세계인들의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이게 바로 세계문화유산의 선정기준이기도 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Outstanding Universal Value)라는 것이다.

30년도 더 지난 88올림픽 개막식을 하릴 없이 떠올린 것은 지난 주말 본격 개장한 태화강국가정원 때문이다. 온갖 종류의 장식물로 꽉 채워진 태화강국가정원. 제철을 맞아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국화가 태화강국가정원을 뒤덮은 것도 모자라 하트에, 와인잔에, 고래에, 민들레에, 지도에, 인형에… 조금이라도 틈만 있으면, 사람들이 걸어다닐 길조차도 쪼개서 알록달록 조형물들을 펼쳐놓았다. 심지어 샛강 안에도 청개구리 조형물이 서 있다. 여백은커녕 작은 빈틈도 없다. 태화강의 상징인 십리대숲조차 눈에 띄지 않을 정도다. 마치 웨딩촬영을 위해 급조한 정원처럼 보인다.

태화강은 울산이라는 공업도시의 한가운데 자연이 남겨준 소중한 ‘여백’이다. 여백이 선물인 것이다. 태화강국가정원의 성공은 바로 그 여백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살려내느냐에 달렸다. 새삼스레 꽃을 심을 이유도 조형물을 설치할 필요도 없다. 철따라 이름없는 들꽃이 피어나고, 억새가 햇살을 받아 수없이 반짝이고, 때때로 어디선가 새가 울고, 강물에선 누치가 뛰어오르고, 바람이 불면 대숲이 크게 일렁이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나라는 눈을 들면 사방이 아름다운 산이다. 자연과 사람이 가깝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앞마당에는 아예 정원을 만들지 않았다. 담장을 낮추어 너머로 보이는 경치를 눈에 담으면 그것이 곧 정원이기 때문이다. 대갓집에선 대개 후원(後園)을 만들었으나 그마저도 멀리 경치를 빌려오는 차경(借景)으로 자연스러움을 강조했다. 중국·일본과 다른 한국식 정원의 특징이다.

영국 첼시플라워쇼에서 2011, 2012년 2년연속 수상한 가든디자이너 황지해씨는 한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자연 그 자체를 데려다놓는 한국식 정원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진짜 숨이 트이는 자유를 주는 이상적 정원의 모습”이라면서 “자연 그대로를 마당으로 끌어들이는 차경기법을 사용하고 나무의 물결과 숲의 덩어리를 감상할 수 있는 바람 좋은 언덕 언저리에 정자를 하나 놓는, 이런 한국정원이 세계인들에게 똑같은 평화로움을 선물할 것”이라고 했다.

잔치는 끝났다. 지난 주말 열린 태화강국가정원 선포행사는 먹을거리가 많아야 하는 떠들썩한 잔치였다고 치자. 잔치는 한번으로 족하다. 알록달록하고, 화려하고, 복잡한 태화강은 요샛말로 ‘TMI’(Too Much Information)다. 어슬렁어슬렁 ‘느릿’하게 걸으면서, 일상에서 옥죈 마음을 ‘느슨’하게 풀고, 세월을 잊은 듯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면 아무것도 차린 것이 없어도 세상 풍족한 잔치상이 될 것이다. ‘꾸안꾸(안 꾸민듯 꾸민)’로 깨끗하게 정돈하면서 자연 그대로 가만 내버려 두기만 해도 태화강국가정원은 날마다 진수성찬이다. 정명숙 논설위원실장 ulsan1@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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