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수 울산판화협회 회원

얼쩡이는 한정된 장소에서 배회하며 일없이 얼쩡거리는 사람을 말한다. 언젠가 먼 나라로 여행을 갔다. 먼 거리 이동 중 점심시간이 되었다. 버스는 조용한 시골 마을로 들어갔다. 인솔자는 5대째 운영하는 역사있는 식당이라고 소개했다. 출입문을 들어서니 큼직한 풍채(風采)에 수염을 알맞게 기른 노인이 우리를 반겼다. 일부 깨어진 식기를 제외하고는 고풍스럽고 제법 오래되고 가구들로 갖추어진 식당이었다.

그 노인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의 할아버지 때부터 운영된 가게이며, 지금은 손녀가 운영한다고 했다. 자신은 아무 결정권이 없으며, 손녀가 결정하면 가족 모두가 따르는 것이 이 가게의 특징이란다. 식사 후 이 집 농장에서 생산된 과일과 기념품도 조금씩 구입하여 이곳을 떠났다.

지난 추분 날 경주 오릉에서 행사를 마치고 집안어른 모시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내남 장터 입구에 있는 식당 ‘황우’를 찾았다. 육회비빔밥을 시켜 먹는 중 연세가 지극하신 할머니께서 우리 자리로 오셔서 부족함이 없는지 점검하러 오셨다. 오래 전부터 이 식당을 운영하면서 쌓아 온 조리의 대물림을 며느리나 딸이 전수받아서 운영한다. 어떤 식당에는 가게에 나타나서 손님을 안내하기도 하지만 고인이 되었을 경우에는 그 분의 사진을 간판에 모셔두기도 한다. 옛날부터 쌓아 온 단골을 잃지 않으려는 의도도 보인다.

어릴 때 부산 보수동에서 자랐다 하여 보수어른으로 불리시는 분이 있다. 이 분은 기업체의 비상임 고문으로 지내신다.

‘빵 안에 채소와 고기를 넣은 서양음식’이 한창 유행이다. 이 가게입구에는 서양인물을 한 인형이 서 있다. 이 가게의 창업자이며 이 가게의 맛과 품질을 책임진다는 의도로 세워진 입체광고물이다. 이런 분들의 공통점은 얼쩡이라는 점이다. 이 분들은 결정권이 없다. 경영에 참여는 않지만 보이지 않은 힘은 매우 크다.

날씨가 추워지면 김장준비가 한창이다. 어떤 가정에서는 가족 수 보다 많은 양의 김장을 한다. 한편 맞벌이 하면서 그냥 편하게 사 먹으면 된다고 김장의 양을 줄이라고들 말한다. 그래도 매년 많은 양의 김장을 하신다. 먼 곳에 가 있는 자식에게 보낼 요량이다. 그리고 끝나면 온 몸이 쑤신다고 고통스러워한다. 때로는 어린아이들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등·하원도 시킨다.

이 얼쩡이는 우리와 너무 가까이 있으면 서로가 불편하다.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 우리 주변에서 필요하다 싶으면 나도 모르게 나타나서 해결해 주시고 사라진다. 그 얼쩡이는 참 바쁘다. 할 일도 많다.

한편 우리에게 때로는 그 존재감을 잊고 사는 경우가 있다. 함께 살면 귀찮기도 하다. 간혹 잔소리도 하신다. 분가(分家)하여 살면 가끔 잊기도 한다. 내가 경제적 지원을 받으려할 때는 어김없이 필요한 분이다. 그러나 지원이 끝나면 소흘해 지기 쉽다. 그러나 우리와 떨어져 멀리 계셔도 항상 우리의 주변에서 얼쩡거린다.

심지어 저승에 계시는 분도 불러들여 우리 주변에서 얼쩡거리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제사를 지낸다. 그 제문은 통상 이렇다. ‘세월이 덧없이 흘렀습니다. 돌이켜 보건데 그때의 추억을 잊을 수 없어…’ 종교마다 제사의 형식이 다르다. 추도회, 추도미사, 이 모두가 조상을 불러들여 우리 주변에서 얼쩡거리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안계시니 그 사랑도 그립다.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이 많아진다. 혼밥 먹는 사람도 늘어난다. 이들에게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대개는 ‘목표를 이루고 나서’ ‘불편하고 힘들어서’ ‘이상적인 배우자가 나타나야’ 편하고 가질 만큼은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 결혼이라는 점이란다. 아이 낳기도 힘들어 한다. 키우기 어렵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선 편한 것과, 주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준비된 재력이 부족해서’라는 이유라면 사는 재미를 잘못 배웠다. 그래서 자신이 얼쩡이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훗날 후손이 없으니 얼쩡거릴 때도 없다. 기대가 높으니 이루기가 힘들다. 그러나 얼쩡이는 참 바쁘다. 그래서 묻는다. 왜 힘들고 바쁘게 사시냐고. 답은 이것이 사는 재미란다. 박현수 울산판화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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