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했던 잎, 찬란했던 꿈조차 순환의 법칙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이제는 회한(悔恨)처럼 낙엽만 쌓였다. 잎 져버려 텅 빈 공간 한 겨울의 햇살은 짧기만 한데 태양은 오늘도 서산으로 저문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도는 것임을 머리로는 알았으나 몸으로는 쉽게 체험되지 않는다. 해 저문 저녁, 노을조차 짧아져 바람은 가득 냉기를 품었고 냉기 품은 바람은 벌거벗은 나목을 스치고 흔들며 무심히 겨울 속을 지나간다. 나목은 조용히 눈을 감는다.

화담 서경덕이 집을 나서는데 젊은이 하나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사연인즉 자신은 소경이었는데 조금 전 갑자기 눈이 떠져서 사방이 환하게 밝아오더라는 것이다. 너무 기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막상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길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화담은 “그럼 도로 눈을 감으시오(還閉汝眼)”라고 했다. ‘환폐여안’은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내 인생의 최전성기에 문득 뒤를 돌아다보니 숲속에서 길을 잃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돈과 권력에 취해 방향감각을 잃고 인생의 나락으로 추락했던 단테가 <신곡>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한 말이다. 오늘의 현실과 내용은 과거의 내가 만든 것이다. 선현(先賢)은 권력에 눈멀어 길을 잃은 자들에게 다시 눈을 감으라고 일갈(一喝)한다. 눈을 감음으로써 소경은 다시 길을 찾는다.

모든 질서는 시간과 함께 파멸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여기에 저항하여 생명체는 끊임없이 질서의 흐름을 집중시키며 원자적 카오스의 파멸을 피해간다(E. 슈레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궁리 2017). 정신적인 에너지를 통해 내면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산만한 사람보다 더 오래 살고 건강하다(Aging cell8, 2009. 9).

근원으로 돌아감을 고요함(靜)이라 하고 이를 일컬어 본성을 회복한다고 한다(도덕경). 고요함은 눈을 감음으로써 생겨난다. 조용히 눈을 감은 겨울 나목. 폐안(閉眼)은 내면을 성찰한다. 성찰을 통해 질서를 회복한다. 한계에 대한 예리한 인식조차 폐안의 결과다.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고 없던 길이 나타난다. 다시 눈감은 겨울 나목, 어린 것은 다부지고 노거수는 장엄하다. 꿈은 다시 피어나 무성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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