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 자연의 리듬에 순응하기보단
목표성취 위해 무리하게 시간 쪼개 써
불면증·공황장애 등 부작용 나오기도

▲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새해가 시작되더니 어느새 연말이다. 해가 갈수록 세월은 속도가 붙어서 아찔하다. 요즘은 연말의 아쉬움도 새해의 설렘도 예전 같지 않다. 못 다한 일 목록만 떠올리면서 새해가 마디 없이 밋밋하게 이어진다.

어릴 적 연말엔 이유 없이 설렜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마음을 들뜨게 했고, 목표를 성취한 사람이나 못 이룬 사람이나 연말은 포근했다. 새해엔 달라지고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차올랐다. 경제가 고도성장하던 시절의 낙관적 분위기 탓일 수도 있고, 이제 와서 옛날의 좋았던 기억만 선택적으로 떠올렸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요즘은 연말에 한 해가 저문다는 감흥을 느끼기 어렵다. 어찌 보면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다. 해가 바뀌고 신기능 휴대폰이 나와도 살아가는 모습은 변함없고 밀린 일은 이어진다. 지구 공전 주기의 어느 지점을 새해로 지정해서 기념한들 나와 무슨 상관이랴. 연말 들뜬 분위기에 휩쓸려 일손 놓고 있으면 나만 손해 아닌가? 그래도, 뭔가 아쉽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다.

우리 인간은 수만 년간 자연과 문명이 만들어온 리듬을 타고 살아왔다. 하루, 일주일, 사계절, 일 년의 리듬. 최근 백여 년간 인간은 과학 발전과 개인의 노력으로 몸에 배인 리듬을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조명 기구와 인터넷 덕분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일하게 되면서 삶은 무한경쟁의 경기장이 되었다. 이 경기장에서 노력은 여전히 바람직한 삶의 태도이자 성공의 원천이지만, 일부 청년에겐 보상 없이 소진하게 만드는 ‘노오력’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진료실에선 다른 측면에서 노력의 부작용을 보게 된다. 삶의 리듬에 순응하기보다 시간을 쭉 펴고 늘려서 잘게 잘라내어 목표 성취에 쓰려는 무리한 시도가 문제다. 다시 말하자면 그냥 노력이 아니라 목표에만 매달리는 헛된 노력, 혹은 집착이다.

리듬에 저항하는 흔한 예로 불면증이 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유난히 잠이 안 오는 날이 있다. 하지만 피로와 졸림에 몸을 맡기면 잠이 드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불면은 반복될 때 문제가 되는데, 그 원인은 대개 자려고 노력하는 데서 비롯된다. 내일이 걱정되어 오늘은 꼭 자야겠다고 마음먹어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긴장되고 정신이 말똥해져서 잠이 달아난다. 낮에 잘 지내다가도 밤만 되면 어김없이 불안해진다. 이럴 때는 단단히 마음먹기보다 힘을 빼고 느긋해지는 요령이 필요하다. 심호흡과 명상, 이완훈련이 도움이 된다.

다른 예는 완벽하려는 노력이다. 농경시대의 괭이질은 실수해도 되지만 현대인은 의사 결정, 업무 마감시간, 마우스 클릭 하나가 모두 중요하다. 이런 가운데 실수를 피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실수를 유발하고 신체증상도 일으킨다.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어느 직장인은 회식자리에만 가면 손이 떨린다.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애쓰다보니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술을 따르거나 받을 때마다 손이 떨리는 것이다. 물론 혼자서 수저나 컵을 들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유사한 예는 수없이 많다. 연습할 때는 잘하다가 시 낭송하러 무대에만 올라가면 얼어붙고, 비행기나 기차만 타면 공황발작이 생기며, 은행원 앞에서 글씨가 떨려서 몇 년간 통장의 돈을 못 찾고, 심지어 저절로 숨 쉬는 것이 못 미더워 숨을 의식하며 정확히 쉬려다가 호흡곤란이 생기기도 한다. 반면 이러한 문제를 훈련으로 극복하는 전문가도 있다. 우리나라 양궁 선수는 몰입하되 집착하지 않는 마음수련을 통해 힘을 조절하고 자연스러운 호흡을 유지한다.

진료실 너머 일상에서도 몸과 마음의 리듬을 부득이 거스르는 힘겨운 시도를 흔히 본다. 생업에 쫓겨 밤늦게까지 일하는 자영업자, 주말에도 업무 걱정을 못 떨치는 직장인, 평소 운동과 수면 시간을 희생하고 명절과 방학 기간까지 끌어당겨 공부하는 수험생, 모두 노력과 소진의 경계를 넘나들며 분투하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힘든 한 해였다. 잠시 물러나 저무는 기해년을 가슴에 새기고 내년에는 원시 리듬에 몸을 맡기는 상상을 해본다.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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