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어느덧 한해가 저물어간다. 시간은 아득히 강물처럼 흘렀다. 굽이굽이 들판을 품고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도 굽이치며 흘렀다. 강은 삶(living) 같았고 삶은 흐르는 강물 같았다. 강물처럼 흘러간 한해의 삶. 말라버린 넝쿨은 오욕과 퇴행이었고 한 여름의 벌레소리는 그리움이었다. 어떤 날은 봄 햇살의 제비꽃 같았고 어떤 날은 한겨울 강가의 조약돌 같았다. 결핍과 고통, 슬픔과 그리움, 따뜻했고 차가웠던 모든 날들이 한해의 저편으로 저물어간다. 바닥짐을 가득 실은 배가 작은 파도에 흔들리지 않듯 슬픔과 고통, 사랑과 그리움은 삶의 바닥짐이 되어 강물처럼 굽이치며 흘렀다. 굽이칠 때마다 세포는 일어나 분열했고 분열할 때마다 돋아난 속살 사이로 한겨울 햇살이 스며든다. 강물처럼 흘러온 삶, 이제 어느 골짜기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우리 삶의 내용과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타고난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 발달의 첫걸음들은 유전자에 고정된 프로그램을 따르지만, 생물이 여러 세포로 이루어진 이후에는 자신의 유전적 요소들 외에 외부의 자극들도 각 세포의 종류와 모습을 결정한다(Conrad Hal Waddington 1905~1975). 매 끼니마다 먹는 음식, 스트레스, 담배, 학습, 사랑과 고통, 기타 많은 것들이 삶의 내용과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다. 더구나 민감한 시기에는 그리 크지 않는 사건들이 모여도 우리를 다른 ‘삶의 골짜기’로 이동시킬 수 있다(페터 슈포르크,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 갈매나무 2014).

생활방식이 달라지면 몸에서 만들어내는 단백질마저 달라진다. 마침내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과학(후성유전학)은 이점에 대해 확실한 근거를 제시한다. 변화를 유발하는 것은 보통 아주 미세한 요인이다. 과학은 이러한 후성적 조작을 통해 꿀벌 유충을 여왕벌로 만들어 냈다. 건강하고 장수하는 삶, 매력적인 인격의 잠재인자는 대부분 유전자 속에 담겨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나이가 들수록 골짜기는 점점 깊어져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기는 것이 더 힘들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몸에서는 여전히 창조가 진행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흐르는 강물처럼 또 한해가 저물어간다.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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