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 전 국립합창단 예술감독·합창지휘박사

우리가 잘 아는 세명의 슈트라우스 중 한명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는 왈츠로 이름난 요한 슈트라우스 일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1804년)나 요한 슈트라우스 2세(1825년)는 부자지간이며 오스트리아 태생인 반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독일 태생이다. 다만 이름이 슈트라우스일 뿐 각기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다른 삶을 살았다.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아버지가 음악가라는 것이다.

리하르트의 아버지는 뮌헨 궁정의 호른 주자였으며 왕립음악학교 교사였다. 어머니도 음악애호가였다. 그래서 리하트르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도도 배우고 유명한 연주자인 베노발터에게서 바이올린도 배울 수 있었다. 마이어라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에게서 작곡도 배워서 6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그 재능이 모차르트에 비견되기도 했다. 뮌헨대학에서 철학·미학을 공부한 뒤 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세계 최초의 직업 지휘자인 한스 폰 뷜러의 추천을 받아 마이닝겐 궁정악단의 지휘자가 되어 브람스에게서도 인정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곡을 가장 잘 부르며 해석을 잘하는 소프라노 파울리네와 결혼하여 음악적 동지로 활동영역을 넓혀 나갔다. 뮌헨, 바이마르, 베를린, 빈에서 오페라 지휘자로 이름을 알렸고 베를린필하모니와 빈필하모니의 지휘자가 됐다. 특히 잘츠부르크음악제의 지휘자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독일 나치정권 하에서 음악국 총재로 일한 경력이 화근이 되어 나치 부역자로 몰려 한동안 음악계에서도 죄인취급을 받으며 두문불출했다. 그러나 사실은 음악국 총재로 있을 때 유태인인 멘델스존의 작품 <한여름밤의 꿈>을 다 바꿔서 새로운 제목으로 다시 작곡하라는 나치 정권의 명령을 거부하고 멘델스존의 작품을 지키며 그 자리에서 물러났던 일이 밝혀져, 그의 나이 84세에 나치 숙청 재판소로부터 무죄선고를 받았다. 그후 다시 그의 작품이 연주되고 좋은 평가를 받으며 독일 후기 낭만파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음악가로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구천 전 국립합창단 예술감독·합창지휘박사

#추천음악 = Richard Strauss, Also sprach Zarathustra(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지휘 오스모 벤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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