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범상 울산대 명예교수·실용음악도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만이
정의·공정이라고 외치는 젊은이들
교사·교수의 신뢰도도 수직하락
가치가 혼재된 젊은세대와
색안경 낀 기성세대의 괴리감

망국의 그림자도 짙어져최근 친구로부터 재미있지만 한편 매우 씁쓸한 얘기를 들었다. 그가 물었다. “수강생이 100명으로 제한된 과목에 희망자가 몰려 200명이 수강 신청했다. 100명을 수강 취소시켜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내가 모르겠다고 하자 그가 말했다. 학생들을 몇 명씩 묶어 팀을 구성하고 합심하여 공부하는 과제, 즉 팀 과제를 내어 평가하겠다고 하면 일단 50명이 빠진단다. 같은 팀 내의 동료팀원들의 능력과 노력여하에 따라 나에 대한 평가가 영향을 받는 것은 불공정하고, 시간 맞추는 것도 귀찮기 때문이란다. 나머지 50명은 어떻게 하냐고 묻자, 그는 기말고사는 논술로 한다라고 하면 또 50명이 빠진단다. 객관식 채점은 공정하지만 교수의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된 평가는 믿을 수 없다는 얘기다.

최근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한 권력자 자녀의 입시 불공정문제에 대한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얘기였다. 하기야 대통령과 교육부마저 입시공정성을 제고하기 위해 고교교사들의 내신평가를 기본으로 하는 대학수시모집을 축소하고 수능시험성적을 기본으로 하는 정시모집을 확대하겠다고 하니 어찌 보면 정부가 학생들에게 선생들의 주관적 평가는 불공정하다는 의식을 조장하는 꼴이다. 작금 교사나 교수가 학생들로부터 받는 신뢰도는 수직강하하고 있다. 취직시험에서 교수의 추천서는 고려사항은커녕 제출서류 목록에서 빠진지 오래다. 아무튼 공정(公正)에 대한 젊은이들의 생각과 팽배한 개인주의가 빚어낸 웃지 못할 현실풍자이다. 나의 생각이나 내가 하는 행동만이 곧 ‘정의(正義)이며 공정’이라고 외친다.

그 친구의 또 다른 얘기는 좌중을 웃겼다가 울렸다. 학생이 교수에게 ‘교수님, 이번 기말시험문제는 어디서 나오나요?’라고 물으니, 그 교수는 ‘배운 범위 내에서 나온다’고 대답하였단다. 그런데 막상 시험을 보니, 학생 입장에서 볼 때 교수가 말한 시험범위를 초월한 문제가 있었단다. 그리하여, 학생이 교수에게 따져 물었다. ‘교수님, 왜 거짓말하셨습니까? 우리가 배운 내용 밖에서 문제가 나왔잖아요? 공개사과하세요!’ 그런데 그 교수는 철저한 강의준비를 위해 학생들에게 배포하는 강의자료 옆 빈 공간에 필요한 추가적인 내용을 깨알같이 메모해두는 버릇이 있었단다. 그 메모를 학생에게 보여주며, ‘이것 봐라. 모든 문제가 내가 말한 내용 중에 있지 않느냐? 이제 네가 공개 사과하라!’고 했단다. 다음날 게시판에 그 학생이 공개사과를 했다는 얘기다. ‘공(축구공 한개), 개(강아지 한 마리), 사과(사과 한개)’를 그림으로 그려 달랑 게시한 것이다. 이 얘기는 어느 대학에서인가 실제 있었던 일이란다. 자, 과연 이런 짓이 재미있는 위트(wit)인가? 교수에 대한 조롱(嘲弄)인가? 이 게시물을 접하고, 교수가 화를 내면 위트를 모르는 꼰대가 되고, 기발하다고 웃으면 바보가 된다. 만일 교수가 똑같은 방식으로 공개사과를 했다면 아마 학생들로부터 기만행위로 형사고발 당했을지도 모른다.

위의 첫 번째 예는 ‘사회적 공정’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가치가 혼재된 젊은 세대의 시각, 나아가 이러한 판단오류(?)를 부채질하는 정부의 오도(誤導)된 자세를, 두 번째 예는 학생의 교수에 대한, 나아가 젊은 세대의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 더 정확히는 위트를 가장(假裝)한 조롱과 세대단절의 실상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작년 이맘때 나는 바로 이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송년의 글을 쓴 바 있다. “국민은 두 갈래로 찢어져 서로 살벌하게 째려보고 있다. 각종 정책과 통치행위를 둘러싸고 그 방향과 속도에 심히 불안해하는 집단과 오히려 더욱 가속을 내야 한다는 집단이 같은 버스에 타고 위험한 질주를 하고 있다. 그러나 내년엔 버스기사가 옳은 방향을 찾아 안정된 속도로 운전하여 조마조마한 국민의 마음이 치유되기를 기대하자”고 희망적인 말을 했었다. 그러나 꼭 1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버스의 좌회전운행은 더욱 확실해졌고 속도마저 빨라져 이젠 방향을 틀기는커녕 속도를 줄이기도 어려워졌다. 나아가 두 집단 간의 간극은 더욱 벌어져, 한 집단은 우회전하는 버스로 갈아타기에 이르렀으며 이윽고 그 두 버스는 정면충돌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A버스에서 B버스 안을 보자. ‘젊은이가 많다. 무지와 가난 속에서 그토록 애써 이룩한 풍요와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젊은 사람들이 개인할거주의, 패배주의에 매몰되어 기성세대·기득권층을 타도하자, 자본주의가 대수냐, 김정은 사회주의면 어떠냐, 세금 왕창 걷어 모두 나누어 쓰고, 일 안해도 실업수당 팍팍 받는 사회가 좋다고 주장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죄가 없다, 그들을 죄인으로 다루는 검찰이야말로 죄인이다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B버스에서 A버스 안을 보자. ‘나이든 사람들이 많다. 꼴 보기 싫은 틀니 낀 늙은이들이 우리의 희생위에 지하철 무임승차하고 의료보험혜택 누리고, 자기들만의 풍요와 자유를 지키자고 주장한다. 우리는 직장 구하기도 집 장만하기도 어려운데. 군사독재 정권이 오히려 그립다고 외쳐대며, 통일을 위해 애쓰고 있는 형제나라를 주적으로 몰고, 통일을 반대하는 미국·일본과 협력하여 전쟁이라도 불사하자고 외쳐대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역사 71년, 오래 버틴 것일까. 하기야, 그 막강했던 진(秦)나라도 15년, 수(隨)나라도 38년 만에 망했으니 그에 비하면 우리는 충분히 길게 왔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엔 망국(亡國)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무거운 마음으로 2020년을 맞는다. 윤범상 울산대 명예교수·실용음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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