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그막의 아버지
벗어놓은 양말이며 옷가지에서
거름냄새가 났다
그건 아버지가 비로소
아버지를 포기하는 냄새였을까
그 옛날 장화를 벗을 때나
땀에 전 수건을 받아들 때 나던
그 기세등등한 냄새에서
초록을 버린 풀들이 막 거름으로
이름을 바꿀 때의 냄새가 났다

아버지가 앙상한 등짝으로 부려놓은 풀 더미에 가축 오줌과 똥을 잘 섞는다 각자의 냄새를 지켜내겠다고 서슬 퍼렇게 날뛰던 것들이 오래 지켜온 습성을 버리기 시작한다 저마다의 냄새로 진동하던 것들이 고집을 버려 삭아지고 토해내며 거름으로 될 때의 냄새가 난다 검은 흙빛 미지근한 열감으로 모든 냄새들이 포기하여 뭉쳐진 거름

들녘을 키우며
아낌없이 주는 거름
깜빡 졸고 있는 그 틈에도
아버지의 밭은 성성했다

러닝셔츠 구멍 사이로
기력 다 빠져나간 아버지의 밭에
폭 삭은 거름 한 짐 뿌리고 싶은데
지금쯤 아버지는
어떤 냄새로 접어들었을까

▲ 일러스트=김천정
▲ 이정희

당선소감-이정희/ 러닝셔츠 입고 일하시던 아버지 떠올려
객지를 떠돌다 고향 신작로에 올라서면 걸음이 빨라집니다. 푸근한 냄새를 따라가면 외양간 옆에 거름 밭이 있었습니다. 짚과 풀 더미 가축의 배설물, 개숫물까지 섞이고, 썩어서 뭉쳐진 전혀 다른 이름으로 태어나는 거름. 자신을 버려 온전히 썩지 않으면 거름이 될 수 없지요.

나무들은 몸집을 불리기 위해 생살이 툭툭 터지는 아픔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12월 추위에도 개나리가 꽃눈을 터뜨리고 나직한 음악 같은 꽃들은 피어납니다. 아무도 계절을 앞서갔다고 투정 부리지 않습니다. 거름은 꽃을 피우려는 어떤 것도 선별하지 않습니다. 밑거름 웃거름은 새로운 발상을 끊임없이 재촉합니다.

구멍 난 러닝셔츠를 입고 바람과 햇살, 비를 끌어다 뒤적이기를 멈추지 않던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이 도드라지고 마른 가지가 침묵의 기다림으로 들어간 날에 당선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한참이나 부족한 시를 영광의 자리에 올려주신 경상일보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긍정의 에너지로 격려해주던 남편과 열심히 응원해준 사랑하는 딸 지은 지수 지호, 발상의 전환을 일깨워주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시의 지평을 열어주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교수님들과 문우님들, 이종섶 선생님, 네클 고맙고 사랑합니다.
약력
-1961년 경북고령 출생
-효성여대 졸업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 과정 이수

 

▲ 박종해

심사평-박종해 / 詩風 지양한 명징하면서도 깊은 울림의 시
응모작의 수준이 아주 높다는데 만족감을 느끼고, 예심에 올라온 30편 중에 기억에 떠오른 두 편을 골랐다. 그리고 나머지 작품들을 두고 어떤 기준과 방침을 내 나름대로 세워 여러번 정독했다. 훌륭한 시인들의 요람인 신춘문예가 오랜 연륜을 거치면서 부지불식간에 신춘문예라는 시풍이 형성되었다. 새롭고 참신하고 실험적이라는 미명 아래 다다이즘(Dadaism)의 시, 시적 변용이 지나쳐 모호하거나 난센스적인 시, 꺾고 비틀어 그로테스크한 시들이 얼굴에 분칠을 하고 나서게 되었다.

숙고 끝에 가려낸 ‘6’과 ‘거름’은 참신하고 실험적인 시와 명징하면서도 울림이 큰 시의 대결이었다.

‘거름’은 이기심과 자기주장이 팽배한 사회상을 표출하여 서로 자신을 포기(버림)함으로써 소통하고 상생하는 이치를 사물에서 깨닫게 하는 깨달음의 시이다. 특히 가족의 유대가 무너져 가고 있는 이 시대에 가족의 거름이 되는 숭고한 아버지상을 잘 부각하였다.

시인은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길을 열어주는 언어의 전달자(메신저)가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독창적이고 권위있는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걸맞는 당선자 ‘거름’의 시인을 새해와 함께 시 애호가들 앞에 내 보낸다. 부디 우리 시단의 ‘거름’이 되길 빌어 본다.
약력
-198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이상화시인상, 성균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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