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현리(德峴里)는 상북면 13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덕현"은 큰 고개를 나타내는데, 이 곳에 운문고개, 석남고개 등 높은 고개가 있기 때문이다. 세종 때 석남동(石南洞)이라 했고, 그 후 하북면에 속했다가 일제 때인 1911년 덕현동·삽리동(揷里洞)·행리동(杏里洞)으로 갈라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다시 합해져 덕현리라 했는데, 석리(石里)와 행정(杏亭)의 두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살구지이라고도 부르는 살구정은 살구나무가 정자를 이루고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옛날 한량들이 살터(살티)에서 시살 등을 향해 활을 쏘며 훈련을 하고 쉬어가는 곳에 많은 살구나무가 정자를 이루고 있었다 하여 마을이름을 살구정이라 부른다. 또 이 곳 사람들은 살구정 마을 앞 동남쪽 들판지명을 "꼬두박샘"이라 부르는데, 지금도 이 꼬두박샘 위쪽의 마을회관 남쪽에는 전주와 같은 긴 장대를 세워두고 돛대라고 부르며 매년 보름 전날 저녁이면 당제와 함께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올리고 있다.

 오랜 옛날 이 곳에 꼬두박샘이라는 깊은 우물이 있어 마을사람들이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마을에 화적떼가 침입해 마을에 불을 지르고 재물을 약탈해가며 심지어 돌림병까지 돌아 많은 병자가 발생하는 등의 재난이 계속되던 때가 있었다. 마침 어떤 도인이 지나다가 지형을 살펴본 뒤에 살구정 마을은 큰 배의 중심부에 해당하고 소호고개는 배의 선수(船首)이며 배내고개는 배의 후미(後尾)인데, 배 중심부에 꼬두박샘을 뚫었기 때문에 재난이 계속된다고 했다. 그래서 샘을 메우고 그 자리에 돛대를 세워서 정성을 다해 제사를 올리고 이 사실을 후세에 전하면 재난이 없어진다고 했다. 이에 마을사람들이 우물을 메우고 돛대를 세운 뒤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그 후부터 살기 좋은 마을이 되었다 한다. 그 때 이후로 살구정 마을은 바가지를 퍼서 먹는 샘을 식수로 사용했다. 그러나 혹 한 두 집 우물이 있었다 해도 배 밑창을 뚫는 셈인 까닭에 재난이 계속되고 집안이 망했으므로 그 다음 사람부터는 다시 우물을 메워 이후로 우물을 파는 집이 없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인간은 자연의 품에서 흙과 햇빛, 그리고 바람과 비의 도움으로 그 생명이 이어지며, 그 중에서도 물은 최후까지도 목숨을 부지시켜주는 귀중한 것이다. 땅속의 물은 지표에서 멀어질수록 깨끗하고 많은 광물질이 녹아 인체에 유익하다. 깊고 좋은 물 대신 샘물만 마셔야 한다 하여 살구정 사람들이 실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곳곳에 많은 지하수 갱이 부실한 관리로 엄청난 오염이 진행되고 있다 하니, 혹여나 마을을 지나던 현자(賢者)가 이 나라 땅속 깊이 저장된 엄청난 규모의 심층수가 오염될 것을 염려해 함부로 깊은 우물을 파지 말라는 하늘의 뜻을 전한 것은 아닐까. 이를 마다 않고 순응하는 살구정 사람들이 참으로 지혜롭기만 하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