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범상 울산대 명예교수·음악이론가

막무가내 밀어붙이기식 反예술정치
독일 나치와 北 정권처럼 문제 야기
골고루 잘사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대통령의 신년사 멋지게 들리지만
완급강약의 조화 없이 왜곡될 경우
골고루 못사는 길로 직행할 수 있어

사전에서는 ‘예술(藝術)’을 ‘미적(美的)작품을 형성시키는 인간의 창조활동’이라고 정의한다. 본디 고대 서양에서 ‘예술’이란 일반적으로 일정한 과제를 해결해낼 수 있는 숙련된 능력 또는 활동으로서 ‘기술(技術)’을 의미하였던 말이었다. 고대 동양에선 사대부(士大夫 상류계층사람)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서, 육예(六藝 禮 樂 射 御 書 數)에서의 ‘예(藝)’는 인간적 결실을 얻기 위하여 교양의 씨를 뿌리고, 인격의 꽃을 피우는 수단으로 여겼다. 즉 현대적 의미의 예술과 기술을 포함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예술을 미적(美的)영역으로 한정시켜 일반기술과 구별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라고 한다.

한편 20세기 들어 문화사조(文化思潮)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기존예술에 대한 인식과 가치를 부정하는 전위주의인 아방가르드(Avant-garde)나 개성과 다양성, 대중성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운동 등을 거치면서 선을 그어 예술을 분류, 정의하는 시도야말로 허망한 짓이라고 평가받게 되었다.

이즈음 나는 ‘예술’을 달리 정의하고 싶어진다.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하느냐로 마음이 기운다. 살펴보면, 전통적인 의미의 모든 예술행위에 있어서 그 방법의 공통점은 아무래도 완급강약(緩急强弱)의 조화이다. 즉, 예술은 ‘완급강약의 조화로운 방식을 통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모든 기술적 행위’라고 말이다. 나의 정의에 의하면, ‘소리흐름의 완급강약’을 핵심으로 공감을 끌어내는 음악, ‘터치의 강약, 구성과 소재의 적절한 조합’ 등을 통해 시각작품을 창조하는 미술, ‘손흥민의 이리저리 제치고 완급을 조절해서 넣는 골’ ‘페더러의 크로스 크로스에 이은 기막힌 다운 더 라인 백핸드 샷’ 등은 예술 그 자체다. ‘슬로슬로 퀵퀵’의 댄스, ‘따다닥 따다닥’ 강약조화로 이불보를 때리는 다듬이방망이질, 연애고수의 ‘밀당(밀고 당기기)’ 등도 모두 예술이다. 반면 ‘닥공(닥치고 공격)축구’, 테니스선수의 ‘제3구째 무조건 발리공격’, ‘욕설과 폭력으로 일관하는 영화’ 등은 예술로 보이지 않는다. 즉 ‘막무가내 밀어붙이기’는 반예술(反藝術)인 것이다. 순전히 나의 생각이다. 나는 예술, 예술적인 것을 좋아한다. 닥공으로 우리 팀이 이겼더라도 나는 찜찜하다.

예술에 대해 색다른 해석을 이토록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소위 ‘예술정치’를 얘기하고자 함 때문이다. 정치얘기 안하겠다는 신년다짐을 깨고야 만다. 통상 좌파(左派)냐 우파(右派)냐를 논할 때, 자신이 속한 국가, 민족, 인종, 종교 등에 대한 집착(執着)정도, 그리고 타국, 타민족, 타인종, 타종교 등에 대한 배척(排斥)정도 등도 중요한 인자이지만 아무래도 경제가 핵심이다.

인류역사상 가장 훌륭한 정치가 중의 한사람으로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 수상은 그의 국회연설에서 ‘우파자본주의의 최대 폐해는 풍요의 불공평한 분배요, 좌파사회주의의 최대 미덕은 가난의 공평한 분배’라고 설파한 바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가장 잘 표현한 말로 유명하다. 돈 많은 자본가가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리든지 말든지, 분배의 불공평성에 대해선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유경쟁을 통해 성장(成長)을 극대화하는 쪽만 지향하면 극우(極右)요, 반대로 돈 많은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압제자로서 타도의 대상이며, 성장의 가치는 극도로 폄하하고, 공평한 분배만 추구하면 극좌(極左)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양 극단(極端)은 모두 바람직하지도 않을뿐더러, 이를 이루려면 ‘막가파식 반예술정치(反藝術政治)’, 소위 독재가 불가피해진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좌우의 지향점보다 사용되는 반 예술방식이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극우독재의 전형이 옛 독일의 나치요, 극좌독재의 전형이 북한정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북한이 공평한 사회라고 인정하는 사람도 없다.

반 예술 사회주의의 예를 들어보자. 옆집 자본가는 에쿠스를 타는데 근로자인 우리 집은 차가 없다. ‘뭐 그럴 수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배 아픈’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 옆집으로부터 반 예술적 방식으로 고액의 돈을 거두고 거둔 돈을 우리 집에 나누어줌으로써 두 집 모두 소나타를 타게 됐다면 나는 공짜로 차가 생겨 기분이 좋아질지 몰라도 옆집은 기분 더러워진다. 인지상정이다. 이때 집권측은 기분 좋아지는 사람의 표(票)가 많다고 보기 때문에 이러한 ‘마약성 포퓰리즘’의 유혹을 받게 된다. 한편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돈 버는 사람은 왕창 빼앗긴다고 느끼고 안 버는 사람은 오히려 돈을 받으니 누가 일하고 돈 벌고 싶겠는가. 순식간에 부(富)가 줄어 세금도 안 걷히고 돈이 바닥난다. ‘한 번 공짜는 영원한 공짜’이므로 돈을 마구 찍어내게 되니 화폐가치가 떨어져 물가는 천정부지로 뛴다. 궁극적으로 두 집 모두 차 없이 공평하게 걸어다니게 된다. 신발마저 닳으면 맨발신세다. 이제 양쪽 집에 일하여 부를 창출하라고 채찍질해도 먹힐 리 없다. 이런 상황에 도달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예상외로 짧다. 이 길을 간 나라가 바로 베네수엘라이다. 나는 심한 불공평도, 무조건 공평도 모두 싫어하지만 이를 반 예술로 다루는 게 훨씬 더 싫다.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금년엔 <골고루>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러나 <골고루>의 내용이 왜곡되어 앞의 반 예술방식이 출현한다면 이는 오히려 골고루 못사는 길로의 직행을 의미한다. ‘이젠 사회주체세력의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라는 여당 원내대표의 말이 머리를 맴돌면서, <골고루>라는 아름다운 단어가 자꾸 삐딱하게만 느껴진다. 윤범상 울산대 명예교수·음악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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