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연재 울산대 국제관계학과 명예교수

정치가 넓게는 각종 집단의, 좁게는 정부의 정책 결정 및 집행 과정을 의미한다면 정치의 핵심은 정책이다. 정치 과정의 핵심은 정책 결정이고 선거의 핵심은 정책결정자의 선출이다. 대의제는 국민이 직접 입법을 하고 집행을 할 수 없게 된 근대적 사회 변화의 산물로서, 국민이 대표자를 선출하여 정책결정권을 부여하는 정치제도이다. 대의제는 정당과 후보자의 매개로 국민의 의사를 정책 결정 과정에 반영하고 통제하는 정치제도이기도 하다. 현대 민주정치에서 선거는 국민이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가장 기본적인 과정이자 대의제를 현실화하는 제도이다. 선거는 국민의 정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수단 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현대 민주정치에서는 의미와 영향력이 가장 큰 수단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해서는 선거 제도의 존재 자체보다는 운영에 더 큰 가치가 주어져야 한다. 선거 과정에서 자유로운 토론과 선택의 기회가 허용되어 국민이 정책결정자 선택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선거는 국민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가치의 대변자인 정책결정자를 선출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다양한 이해관계와 가치가 경쟁하는 현대사회의 선거에서는 궁극적으로 정책결정자의 선택보다는 정책의 선택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국민이 선거를 통해서 정책을 선택하려면, 정책결정자의 선택이 정책의 선택으로 귀결된다는 등식이 성립되어야 한다. 흔히 정당은 동일한 정강과 정책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어서, 선거에서 특정 정책결정자를 선택하는 것은 동시에 그가 속한 정당과 정당의 정책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 국민이 4·15 총선에서 의회의 정책결정자인 국회의원을 선출하면, 그것은 곧 특정 정당과 정책을 선택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정당과 후보자는 자신들의 정책이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부합된다는 것을 국민에게 인식시켜야 지지를 획득할 수 있다. 영국의 전 수상 블레어의 제3의 길 정책, 일본 지방선거에서의 매니페스토, 미국의 전 대통령 클린턴의 경제 중심 공약, 독일 사민당의 함부르크 강령 등은 체계성, 구체성, 지속성, 실천 가능성을 갖춘 공약을 바탕으로,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며 사회의 미래상을 제시했기 때문에 국민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공약이 정부의 정책으로 전환되려면 이런 기본적 속성들을 구비하고 타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한국 정치에서도 이런 바람직한 변화가 일어났는가. 불행히도 정당과 후보자들이 최근까지도 현실의 변화, 미래의 성찰, 가치의 재정립에 입각한 정책 개발을 소홀히 한 채, 여전히 밀실에서 짧은 시간에 득표용 공약 개발에 주력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여전히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대변한다. 여·야를 불문하고 정당의 공약집은 고용 창출, 복지 확대, 신성장 동력 확보, 정치 개혁, 지역 개발 촉진 등 포장은 그럴 듯하게 되었지만, 체계성, 구체성, 지속성을 결여한 그리하여 실천 가능성을 결여한 파편적 공약들로 채워졌다. 그들은 역대 총선에서 정책 경쟁보다는 지연, 학연, 혈연, 금권, 네거티브 캠페인에 주로 의존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정책선거를 갈구하는 국민들은 번번이 좌절을 맛보고 정치에 대한 신뢰를 거두어 들여야 했다.

그 결과는 자못 심각했다. 역대 정권의 비현실적·근시안적·파편적 공약 이행이, 사회 각 부문에서 반복적으로 문제를 확대 재생산하여, 국가의 혼란과 정권의 실패를 초래했음을 수시로 기억해야 하는 국민의 심경은 착잡하기만 하다. 정당에게는 선거에서의 승리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국민에게는 실질적 선택의 보장이 중요하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선거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정치도 개혁할 수 없다. 선거의 변방으로 밀려난 정책을 선거의 중심으로 복귀시켜야 한다. 자금, 조직, 지명도 중심의 선거를 정책 중심의 선거로 바꿔야 한다. 정책 중심의 선거가 정착되면 국민의 신뢰자본이 확충되어 대의제 민주정치의 정당성과 안정성을 강화할 수 있다. 4·15 총선을 정책선거로 만들어 국민에게 진정한 선택의 기회를 돌려주는 것이, 우리 정당과 후보자들이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다가올 총선에 변화의 훈풍이 불기를 고대한다.

신연재 울산대 국제관계학과 명예교수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