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영만세운동’ 재현 중 시축 장면. 올해 행사는 코로나 때문에 취소됐다.

101년 전 병영만세운동사건
축구공은 50여년전에야 언급
시축자 관련 기록도 제각각
허영란 교수 특강서 문제제기
“역사적 사실 확대 재생산 곤란
심도있는 지역사 연구 필요”

오는 4일은 울산병영만세운동이 일어난지 101년 되는 날이다. 해마다 기념행사가 개최됐지만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취소됐다. 연례행사는 건너뛰지만 그 날의 이야기를 다시 연구하자는 움직임이 일고있다. 관심이 집중되는 대목은 만세운동의 시작점인 ‘축구공 시축’. 축구공은 병영만세운동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1919년 4월4일 아침 일신학교(현 병영초) 운동장에서 축구공이 하늘 위로 치솟았고, 이를 신호탄으로 사람들이 일제히 태극기를 꺼내어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보 취재결과 이토록 중요한 ‘축구공’에 대한 내용은 만세운동 당시에는 언급조차 되지않았고, 이후 나온 기록물 내용도 제각각인 것으로 확인됐다. 울산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져 온 병영만세운동을 새롭게 인식하는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병영삼일운동에 대한 첫 기록은 1965년 <신동아> 3월호에 나온다. 전국 각 지역 만세운동을 그 지역 사람들의 수기로 다뤘는데, 울산병영만세운동은 ‘이문조’가 썼다. 그는 운동에 참가했던 가장 어린 청년이었다. 4월5일(이문조가 날짜를 잘못 기술한 것) 오전 9시 일신학교에 모였고, ‘양석용’이 태극기를 들고 앞장 섰으며, 학생과 청년들이 뒤따랐다는 것이다. 축구공 이야기는 없다.

▲ 지난해 울산박물관 특별전에 소개된 ‘병영삼일만세운동과 축구공’ 이야기.

축구공 이야기는 1969년 보훈처가 낸 <독립운동사>에 처음 등장한다. 병영청년회원들이 4월4일 오전 9시 학교에 모였고, 교사들과 실랑이를 벌이다 학생들을 운동에 합세시킨다. 이후 오전 11시40분 경 높이 차 올려진 ‘풋볼’을 신호로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 시작한다. 다만, 누가 공을 찼는지는 안 나온다.

1990년에 이춘걸이 쓴 <병영의 삼일운동>은 이야기를 좀더 구체화시킨다. ‘양석용’이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었고, ‘이문조’가 축구공을 높이 차 올렸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1919년 병영만세운동으로부터 50년이 흐른 1969년 <독립운동사>에 축구공이 처음 언급됐고, 그로부터 21년이 지난 1990년에 축구공을 누가 찼는지 처음 기술된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축구공 이야기는 여전히 오락가락이다.

2002년 <울산광역시사>는 또다시 ‘양석용’이 공을 찼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실제 재판기록에 따르면 양석용이 큰 광목으로 태극기를 만들어서 휘둘렀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 축구공을 찼다는 내용이 없다.

이러는 사이 지역언론에 게재된 기사와 칼럼마저도 병영만세운동을 다룰 때마다 다른 내용을 기술한다. 어느 기사에는 양석용이 찼다고 했다가, 또 다른 기사에는 이문조가 찬 것으로 쓰여진다. 이같은 논란 때문인지 2017년 <울산을 한권에 담다>는 ‘청년들은 일신학교 학생들과 교정에 모여 축구공을 높이 차 올린 것을 신호로 만세 시위를 시작했다’고만 했을 뿐 누군가를 특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난해 울산박물관 특별전 ‘울산의 만세운동’에서는 또다시 특정인물이 축구공을 차 올린다. 일제강점기의 가죽 축구공을 진열한 뒤 그 아래 설명문에는 이렇게 기술했다. ‘축구공은 병영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역할을 하였다. 병영청년회 회원들은 1919년 4월4일 병영 일신학교 운동장에 모여 학생 등 만세참가자를 모집했다. 어느 정도 인원이 모이자 양석용이 축구공을 하늘 높이 차 올리는 것을 신호로 하여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작됐다’

이와 관련해 특강을 진행했던 허영란 울산대 교수는 “병영만세운동 축구공이 우리 지역사를 풍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100년세월이 흐르면서 ‘사실’로 고착된 지역사를 뒤늦게 다시 연구하는 일은 무척 힘들다”며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는 시대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사실 그 자체가 확대재생산되면 곤란하다”고 했다. 다만 “병영만세운동은 울산독립운동사를 너머 한국근대사에서도 중요한 사건인만큼 비중있는 연구로 지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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