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글의 시대가 아닌 말의 시대
확실한 논리 있다면 긴 설명은 불필요
간결한 말에 진심 담긴다면 감동 선사

▲ 박기준 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살아가면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소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화·토론·연설 등에서 간단 명료하게 잘 정리된 말을 하는 것을 보게 되면 그 능력이 부럽다. 실제 모임에서 ‘한 마디 하라’는 청을 받고 간결하면서 울림이 있는 말을 하려고 하면 쉽지가 않다.

한마디 말로 천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말로 인해 낭패를 보기도 한다. 말은 해버리면 주워 담기 어렵다. 부적절한 말이나 막말은 화근이 되기도 한다. 선거에서는 연설과 토론, 설득과 호소, 공격과 방어의 많은 말들이 오고 간다. 지난주 끝난 제21대 총선에서 ‘30~40대 무지’ 비하 발언 및 세월호 관련 막말과 성착취 n번방 관련 부적절 발언 등이 야당 참패의 한 원인이었다는 말이 있다. 진영간에 다툼이 민감한 상황에서 욕설이나 거짓말이 아니더라도 미디어에 노출된 막말과 부적절한 말은 치명적일 수 있다.

현대는 글의 시대가 아니라 말의 시대인 것 같다. 말로써 전달하는 미디어가 글을 도구로 하는 책을 압도한다. 문자메시지로 대화하는 것은 글이 아니라 글의 모습을 한 말을 전달하는 행위가 아닐까 한다. 버스나 지하철안에서 휴대폰에 고개를 파묻고 끊임없이 문자를 보내는 광경은 자주 볼 수가 있다. 교언(巧言), 허언, 말장난 같은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공중파 TV에 가끔 출연자들이 낄낄거리면서 잡담을 해대는 프로가 있는데 ‘시청자들이 왜 저런 의미없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주의를 끌기 위해 상관없는 말을 하거나 무엇인가 기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말로 끼어드는 것은 공명심 때문이다. 알맹이 있는 말이 아니라면 공연히 한푼어치 안되는 말로 떠들기보다 묵언이 오히려 나음에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요즈음 신종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마당에 위생의 관점에서 침이 튀지 않도록 말수를 줄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과거에는 ‘말을 잘 하면 변호사다’라는 얘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방송인, 교수, 시민운동가 심지어 코미디언까지 말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말하기는 단연 정치인이 그 중심에 있다. ‘국회에 벙어리를 데려다 놔도 말문이 트인다’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사실 국회의원은 선거때 아니면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월적 입장인 경우가 많고, 공적 행사 자리는 물론이고 동네 모임에서도 ‘한 말씀을 할’ 기회가 주어지니 말하기에 이골이 나 있을 것이다. 자주 말하고 길게 말하다 보면 말실수도 생긴다.

통상 설명이나 설득에 있어 말이 길어진다면 근거가 부족하거나 논리가 약한 경우가 많다. 확실한 논리와 증거를 갖고 있다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단순한 것이 해답이다’는 14세기 영국의 성직자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er) 법칙이 말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간단 명료함은 진실과 통한다.

미국 CNN방송에서 라이브쇼를 오랫동안 진행하여 온 래리킹(Larry King)의 ‘대화의 신, 말하기의 모든 것’이라는 책에는 말을 잘하는 방법으로 간결성을 강조한다. 명연설은 모두 짧았다고 하면서 1861년 11월 당대의 가장 인기있던 연설가 에드워드 에버렛의 연설은 2시간 걸린데 반해 이어진 에이브러햄 링컨의 연설은 5분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민주주의를 압축한 내용을 담고 있어 오늘날까지 우리 기억속에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상대가 있는 말은 소통과 공감을 위한 것이다. 솔직함과 진심이 간결한 말속에 담긴다면 공감을 넘어 감동마저 줄 수 있다. 처음부터 말을 잘 하는 재능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간결하고 평이하면서도 잘 소통되고 공감을 얻는 말은 훈련과 노력, 준비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래야 말실수로 인한 오해와 치명적 피해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말은 될 수 있는 대로 짧을수록 좋지 않을까!

박기준 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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