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처용탈 장인 김현우-천년의 얼굴을 나무에 담는다

▲ 40년 세월을 한결 같이 처용탈 제작에 몰두해 온 김현우 처용탈 장인.

‘울산의 쟁이들’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저 담담하게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울산을 기반으로 오랜 기간 전통문화 분야에 몰두하며 최고의 열정과 기량을 보여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 생애와 기예를 소개한다.

詩 ‘처용단장’ 읽고서 처용에 매료
컴퓨터 프로그래머에서 목공예가로
대목장 증조부와 짚공예 장인 부친
집안의 손재주·기술 대물림하게 돼
무형문화재 김천흥 선생에게 배운 뒤
문헌 뒤져가며 자신만의 처용탈 제작
관용과 인자한 모습 강조하는데 집중

여기 40년의 세월 동안 처용의 얼굴을 깎아온 사람이 있다.

울산은 ‘서울 밝은 달에 밤늦도록 놀며 지내다가’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향가 ‘처용가’의 처용이 나타난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천년도 훨씬 전 신라 헌강왕(재위 875~886년) 시절, 왕은 울주군 개운포에서 용왕의 일곱 번째 아들 처용을 만났고, 왕을 따라 서라벌로 들어온 처용은 어느 날 밤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가 역신(전염병신)과 동침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러나 크게 화를 내는 대신 오히려 넓은 관용을 베풀었고, 이에 역신은 앞으로 그의 얼굴이 붙어 있는 문 안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후 천년의 세월 동안 매년 섣달 그믐날이면 궁중에서 악귀를 몰아내고 좋은 기운을 맞이하는 의식 가운데 처용무를 추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그 맥이 끊겼다가, 1923년 순종황제의 탄신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조선 장악원 악사들의 손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다만, 그때에 이미 처용탈이 전하지 않아 결국 일본인 기술자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 김현우 장인이 단풍나무를 이용해 만든 처용탈.

“나도 처음에는 서울 국립국악원 무형문화재 김천흥 선생께 배웠는데 서울 건 악학궤범 그림하고 이미지가 너무 다른 거에요. 처용은 ‘관용의 신’인데 관용도 없고. 그래서 독자 노선을 걷게 된 거죠. 악학궤범 말고도 조선시대 그림들을 쭉 보면 처용의 턱이 점점 길어져요. 변형이 돼서 내려 왔어요. 하기야 1200년 동안이니까 똑같이만 만들어질 수는 없거든요. 처음에는 악학궤범을 보다가, 논문을 쓰고 공부를 하면서 이렇게 된 거죠. 책을 보고 작업을 많이 했어요.”

조선시대 처용탈은 성종 연간에 편찬된 악학궤범 속의 그림을 시작으로 여러 의궤와 그림들에서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악학궤범의 모습 역시 신라 헌강왕 시절 이래로 수백 년이 지난 후의 것일 테니 결국 처용의 원형은 여전히 오리무중인지도 모른다. 김현우 장인은 심소 김천흥(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 선생님께 직접 배우고, 이후 온갖 문헌들을 섭렵하며 자신만의 처용탈을 만들게 되었다.

▲ 원조 처용면.

“원래 처용탈은 악학궤범에 보면 피나무를 깎아서 만들거나 옻칠한 삼베천으로 만든다고 기록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피나무는 중부 이남 지방에서는 잘 자생이 안돼요. 위로 올라가야 있고 울산에서는 구하기 어려워요. 첨에는 나도 피나무만을 고집했는데, 이게 나무를 깎아보면 좀 물러요. 이렇게 칼을 망치로 치면서 쪼아가지고 작업하기 때문에 무른 나무는 더 힘들어요. 그래서 야문 나무로 해요. 소나무ㆍ은행나무ㆍ피나무ㆍ벚나무ㆍ팽나무, 우리나라 나무는 다 써요. 야문 나무는 좀 무거울 것 같지만 탈은 앞면을 깎고 뒤에도 다 이래 깎아 버려요. 두께가 얇아서 무거울 게 없어요. 큰 것도 마찬가지에요. 조각하기에는 벚나무랑 팽나무가 내 손에 맞더라고. 어느 게 제일 좋다기보다 나무는 거의 비슷비슷해요. 야물고 덜 야물고 차이가 있지. 요거 같은 경우에는 단풍나무에요. 단풍나무도 참 좋더라고, 질이.”

▲ 김현우 장인의 선친, 김제홍 짚공예가.
 

그는 처용탈을 만들 때 ‘너그럽고 인자한, 유덕하신 모습’을 표현하는데 가장 집중한다. 처용의 처음 얼굴을 새긴 ‘원초처용탈’은 용왕의 일곱 번째 아들로서 용의 얼굴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유덕하신 처용 아바’의 얼굴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눈이 깊고, 코가 크고, 눈매가 인자하게 웃는, 관용의 모습’을 탈에 담는 것이 그가 처용탈을 만드는 이유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탈을 만들게 된 것 같지만 사실 이는 집안의 오랜 대물림이기도 하다. 천문역서 <칠정산>과 <천문도> 등을 남긴 조선 세종대 천문학자 무송헌(撫松軒) 김담(金淡)이 그의 직계 선조이다. 또한 증조부는 궁궐과 사찰 같은 큰 건축물을 짓는 대목장이었으며, 그의 부친 김제홍 옹은 짚으로 짚신ㆍ소쿠리ㆍ쌀독 등의 일용품에서 방상씨 탈과 소 모형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을 만드는 짚공예 장인이었다. 이러한 집안의 손재주와 기술은 그에게 오롯이 전해졌다. 장인은 공예와 전혀 상관없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인생을 살다가 어느 날 김춘수의 <처용단장> 시를 읽은 뒤 정신없이 처용에 빠지기 시작해, 제대로 목공예를 배운 적도 없으면서 어느덧 40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처용의 얼굴을 만들고 있다.

▲ 악학궤범 속 처용탈 모습.

그 세월동안 70여 차례의 전시회를 개최했고, 이제 다음달에는(6월10일~16일) 울산시 남구문화원 갤러리숲에서 처용무보존회 주관의 제74번째 전시회가 열릴 예정이다.

▲ 노경희 전문기자(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이 글을 쓰고 있는 2020년 5월 현재, 전 세계가 ‘코로나’라는 전염병으로 신음하고 있다. 그 얼굴 그림을 걸어 놓기만 해도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다던 역신의 말을 떠올린다면, 김현우 장인의 처용탈 전시회는 올해만큼은 온 세상을 다니며 열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첫 전시회를 할 때 탈 45점이랑 악학궤범 그림을 걸어놨어요. 한 60대 노신사가 오셔서 ‘내가 강원도 산천에서 자랐는데 어릴 때 집에 이 그림이 붙어 있었다.’라며 확인을 해주더라고요. 실제로 이 그림이 100년 전까지도 집집마다 붙어 있으면서 부적의 의미를 지녔다는 얘기거든요. 역병에는 약이 없으니까, 처용밖에 믿을 게 없으니까.”

글=노경희 전문기자(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사진=김현우 장인 제공 표제=서예가 김중엽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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