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이익 위한 사회적 연대
코로나 대응서 중요성 다시 부각
무한경쟁 패러다임 변화 불가피

▲ 허영란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사회적·생활속 거리두기가 장기화되면서 모든 이의 스트레스 지수가 상승하고 있다. 힘겹게 심리적 안정감을 만들어가던 시점에서 발생한 클럽 확산 사태는, 방역에 협조하며 자제하던 시민들의 짜증과 고통에 기름을 부었다. 폭발한 분노는 어디론가 흘러가야 한다. 간호사가, 군인이, 교사가, 강사가 어떻게 다중이 밀집하는 클럽에 놀러갈 수 있느냐는 지탄이 터져 나왔다.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는 바이러스보다 먼저 퍼져나갔다.

분노와 혐오의 분출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약간은 위로가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방역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난과 손가락질은 밀접 접촉자들을 숨어들게 만들고 검사를 피하게 한다. 바이러스 확산 저지라는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서 당국은 ‘익명 검사’라는 우회로를 만들어 혐오의 폐해를 완화시키고 있다. 살다보면 작은 만족을 얻는 대신 큰 대가를 치르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본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의 경고는 차고 넘치지만 그것 자체가 인간의 한계를 웅변하는 셈이다. 위기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손가락질부터 하는 것은 마음의 위로라도 얻고 싶은 일차원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와는 별개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과 각자도생의 개인주의만으로는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시대를 뚫고 건강하게 살아내기 어렵다. 오히려 개개인의 이기적인 선택이 그 자신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우려가 있다.

코로나19 사태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는 합리적인 공동체가 방역의 주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개인은 다른 사람을 위태롭게 하는 바이러스의 숙주가 아니라 방역을 위해 협력하는 공공의 일원으로서 책임 있게 행동할 것을 요구받는다.

나아가 ‘포스트 코로나’ 즉 코로나 이후의 미래에 관해서도, 급속한 세계화, 격심한 경쟁과 무한 성장 등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거침없이 내달려온 지금까지의 패러다임이 바뀔 수밖에 없다는 예측이 쏟아지고 있다.

위대한 문화인류학자 마가렛 미드(1901~1978)는 인류 문명의 첫 번째 징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모든 박물관의 첫 번째 전시실을 채우고 있는 화살촉이나 토기가 아니라, ‘부러졌다가 치유된 사람의 넓적다리뼈’라고 답했다. 미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야생에서 다리 골절은 곧 죽음을 뜻한다. 위험을 피할 수도 없고, 물을 마시기 위해 강가로 가거나 먹이를 사냥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인간은 다른 맹수의 먹이가 될 뿐이다. 어떤 동물도 부러진 뼈가 치유될 만큼 긴 시간 동안 살아남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부러졌다가 치유된 넓적다리뼈’는 그것이 치유될 때까지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함께 있으면서 상처를 싸매주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며 회복될 때까지 돌봤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돕는 것에서 문명은 시작되었다.

‘넓적다리뼈가 부러진 사람’을 돕기 위해서 누군가는 큰 위험과 곤란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부족한 먹이와 물을 나누어야 하고, 맹수의 공격에 취약해져서 함께 죽음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사회적 연대의 능력 덕분에 인간은 객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동물과는 차별화된 생존의 기술을 발전시키고 문명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우리가 속해있고 더불어 살아야 하는 공동체의 존재를 가시화시켰다. 그것은 좁게는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이며 넓게는 국가, 나아가 지구 전체이다. 단기적으로는 도시나 국가를 봉쇄하는 방식으로 확산을 억제하고 있지만, 이 같은 바이러스 확산 사태는 장기적으로 지구 전체가 함께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이다.

마침 KT가 빌&멜란다 게이츠 재단과 함께 ‘감염병 대비를 위한 차세대 방역 연구’를 진행할 것이라는 뉴스가 전해졌다. 감염병 이후의 지구 문명을 만드는 데 한국이 큰 기여를 하기를 기대한다.

허영란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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