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두 시인·소설가

“세상 사는 일이 너무 힘들고 속상해도 그 가수들이 떼지어 부르는 노래를 듣고 나면 구마 속이 확 트이고 근심 걱정이 싸악 달아난다아인교…. 그라고 김호중이나 김희재가 한곡을 뽑을 때는 또 궁데이를 흔들며 춤을 추고 싶다아인교…. 까마구도 고향 까마구라고 안그런교?”

집 앞 소공원에서 만난 아줌마들이 거침없이 쏟아내고 가는 요즘 세태의 변이다. 사실이다. 지금 상당수의 국민들은 TV조선이 방송중인 트로트 열풍에 휩싸여 있다. 휩싸여 있으면서 코로나19와 각종 정치적 사태로 찌든 마음을 위로받으며 치유하고 있다. 이 광경을 보면서, 직접 겪으면서 가요를 거의 끌어안고 살아야하는 방송사에 26년을 몸담고 50년에 이르도록 이 분야의 전문단체와 동고동락하는 나로서는 남다르게 뭉클한 감회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오늘의 자랑스런 울산 트로트 소리꾼들의 고향 선배인 고복수가 타향살이란 노래로 당대의 가왕(歌王)이 되고 나라 잃고 유랑길에 오르는 우국지사들, 어쩔 수 없이 남의 나라에서 살아야하는 동포들, 모든 겨레의 가슴에 고향과 고국을 잊지 않게 하는 실로 위대한 큰일을 하였듯이 홍자와 김호중, 김희재가 코로나19에 시달리는 국민들의 가슴을 달래고 있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일 수 있으랴’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아줌마들이 불쑥 던지고 가던 ‘까마구도 고향 까마구가 좋다’고 한 말이 다시 기억에서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막히게 울산스러운 그 말을 나는 한국가요사의 황금기를 열었던 고복수로부터 처음 들었다. 60년 저쪽의 세월 속에 묻힌 이야기다.

울산 중구 병영 출신의 정해영 전 국회의원이 서울 서린동에 개인 사무실을 내고 있을 때였다. 역시 울산 중구 병영 출신으로 병영초등학교를 정 의원과 같이 졸업한 가수 고복수가 찾아왔다. 두 사람은 두 손을 마주잡고 흔들기도 하고 서로 껴안아 보기도 하다가 별실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런데 문을 닫고 10분이 되었을까? 난데없이 정 의원이 버럭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다가 곧 영문을 알게 되었다. 그 무렵 고복수는 과거 영화 ‘타향살이’를 제작하는 일에 끌려들어가 흥행실패로 빚이 된 제작비를 떠안고 무척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이를 자세히 알게 된 정 의원이 안타까운 마음에 제작자들을 향해 꾸짖었던 것이다.

돌아가는 고복수가 2층 계단을 밟고 내려가 1층에 이르렀을 때 2층에서 배웅한 정 의원이 말했다.

“복수야! 우리는 산전새미 물먹고 컸데이 힘내라!”

“오냐!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고향 까마귀 아이가! 고맙다! 나 간다!”

손을 번쩍 들어 보이고는 뚜벅뚜벅 걸어가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기만 하다. 나는 그때 그가 말하던 평산미나리처럼 구수하고 담백하던 고향까마귀에 까뿍 취해버리고는 고복수가요제를 만들고 동헌 앞 광장에 타향살이 노래비를 세웠다. 그 고향 까마귀가 요즘은 어쩐지 그 까마귀가 아닌 집단들이 우글거리는 것 같아짐은 어째서일까? 고복수가 말하던 까마귀와 소공원에서 만난 아줌마들의 까마귀는 모두 같아야 하거늘 자꾸만 달라지려는 현실이 너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고향 까마귀의 참뜻은 서로 돕고 한 마을에서 의좋게 살자는 것 외에 더 무엇이 있으랴. 고복수의 타향살이 노래비를 그 자리에 세운 나는 그 자리에만 가면 유달리 수치스런 기억을 살려 내고 마는 일이 있다.

그 비를 세울 즈음에는 울산시의회와 시가 첨예한 대립을 벌일 때이다. Y시장으로부터 타향살이 노래비를 세워도 된다는 재가를 받고 노래비의 제작에 들어갔던 나는 어느 날 시 직원으로부터 참담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시가 제안한 예산안을 의회에서 모두 삭감하거나 삭제하는 바람에 시장이 사표를 냈다는 것이었다. 경남도 내에서 가장 우수한 선임공무원에게만 주어지는 울산시장직을 그만두고 그것도 정년을 3년6개월 남겨두고 가면서 담당자로 하여금 제작비를 완불하도록 조치하고 떠났던 것이다. 그 시절의 얘기가 지금에 와서 얼토당토않은 말인지 모르지만 시민의 입장에선 달리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한다.

최종두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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