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규상 천상고 교사

내가 사는 집 가까이에는 공원이 있다. 지난 9월 초 태풍 마이삭으로 인해 그 공원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브라키오사우루스라는 공룡의 긴 목이 부러졌는데, 구청에서는 그 공룡 주변으로 안전띠를 두르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팻말을 세웠다.

“태풍 마이삭이 공룡을 다치게 했어요. 엄마공룡이 빨리 건강해지도록 어린이 여러분이 많이 응원해 주세요.”

그런데 안전띠 너머 부러진 공룡의 목 위로는 형형색색의 반창고가 수도 없이 붙어 있다. 아마도 공원에 놀러 온 아이들이 엄마공룡을 위하는 마음을 담아 붙인 것일 테다. 부러진 목이 아이들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으니 안전띠를 둘렀을 것이고, 그것은 공원을 관리하는 구청이 지켜야 하는 ‘원칙’이다. 다만 엄마공룡을 응원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외면하기가 어려웠을 테니 일회용 밴드를 붙이는 정도는 허용하는 ‘융통’을 발휘한 것이다. 궤변으로 읽힐 수도 있겠으나, 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뭉클했다.

지난 한주 내내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출석 확인을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할 것이냐를 두고 때아닌 논쟁이 벌어졌다. 동일하게 처리하지 않으니 민원이 잦은 탓에, 회의를 통해 함께 정한 기준이니 이를 지켜달라고 협조를 구했는데, 그 위로 날 선 말들이 쏟아졌다. 일일이 답을 하고 협조를 구하는데, 나중에는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답답한 마음에 다른 학교에서는 어떻게 운영하는가 싶어 여러 학교에 전화를 했는데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은 모양이다. ‘원칙’을 제시한 것인데, ‘융통’만을 요구하는 상황이 몹시 불편했다.

당나라의 유종원이 지은 ‘단형론(斷刑論)’ 하(下)편에는, ‘經非權則泥 權非經則悖(경비권즉니 권비경즉패)’라는 구절이 있다. 원칙을 알되 변통을 모르면 막히게 되고, 변통을 알되 원칙을 모르면 어그러진다는 뜻이다. 이 구절에서 ‘경(經)’은 꼭 지켜야 할 원칙을 가리키고, ‘권(權)’은 상황의 변화에 따른 적절한 대처를 가리킨다. 어떠한 규정을 시행할 때 원칙을 알고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원칙에만 매몰돼 융통을 무시하면 현실과 동떨어질 수 있다. 반대로 융통에만 치우쳐 원칙을 소홀히 하면 규정이 딛고 있는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 ‘經非權則泥 權非經則悖(경비권즉니 권비경즉패)’는 ‘원칙’과 ‘융통’, 이 둘이 겸비되었을 때 어떤 일이든 제대로 수행될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수행이 지지받을 수 있음을 강조한 명문이다.

어디까지가 원칙이고 어디까지가 융통인지 고민했던 지난 일주일이었다. 코로나19의 유행은, 학교에서 무엇을 계획하여 행하든 한두 가지씩의 절차를 더 거치게 한다. 그래서 다들 힘들고 예민할 수 있다. 그럼에도 ‘원칙’과 ‘융통’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우리의 삶에서 원칙과 융통을 함께 갖추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으니, 굳이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면 ‘원칙’에 먼저 힘을 쏟은 후에 ‘융통’을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손규상 천상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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