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미디어 통해 쏟아지는 정보
‘실재’와 ‘수사’의 구분 쉽지 않아
회자되는 용어들 객관적 판별 요구

▲ 김정배 (사)문화도시울산포럼 이사장

며칠 전 모 대학에 있는 지인을 만났는데 그가 불쑥 “자넨 요즘 세태를 어떻게 보나?” 하고 물어왔다. 이런 질문은 자주 받아온 터라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고 상대가 상대인지라 조금은 진지하게 대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회자되고 있는 코로나19, 공수처, 의회독재, 법치주의, 원칙주의자, 부동산, 기레기 등을 새삼스레 떠올렸다. 이런 용어에서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은 화자의 정체성과 역사적 사회적 지위의 전도 현상이다. 도둑과 경찰이 서로 뒤바뀐 꼴이랄까. 우스운 일이지만 시민의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그래서 ‘객관적’ 판별이 요구되고 ‘역사적 맥락에서’라는 말이 등장하는 모양이다.

역사를 공부한 탓인지 주변에서 의견을 말해 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는 편이지만 불편한 경우가 많다. 여기서는 지면상 그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하고 지인에게 건넨 코멘트로 그 이유를 대신한다. “대다수 일반인은 물론이고 다수의 지식인마저 우리의 역사적 위치를 주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길들여져 왔다. 우리 사회의 큰 문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일상에서 역사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싶었다.

물론 시민 각자에게 어떤 사회적 이슈나 인물에 대한 평가 혹은 역사에 대한 기억은 당연히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꽤 설득력 있는 주장일지라도 시민이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이런 인식이 중요한 이유는 민주시민으로서의 품성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지인과 나눈 대화 가운데 일부인데, 우리의 어지러운 세태를 파악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소개한다. 프랑스의 세계적 철학자며 문화이론가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우리가 과잉현실(hyper-reality) 사회에 살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실재가 인공적 혹은 가상적 실재로 대체되고 심지어 조정당하는 시뮬라시옹(simulation) 사회에서 시민은 “근거 없이 만들어진 정보와 이미지를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여 관성적으로 허구의 늪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미디어와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한편 의미는 함몰된 결과라고 한다. 거짓과 진실이 뒤죽박죽되고 거친 말들이 배설물처럼 쏟아지는 척박하고 천박한 우리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두고 한 말처럼 들려 아프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이란 ‘인식된(conceived)’ 혹은 ‘구성된(constructing)’ 현실이지 실재(reality)가 아니다. 하지만 이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만약 독실한 기독교인에게 “누구나 각기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나요?” 라고 말한다면 아마 불신자의 요설 정도로 취급당할 것이다. 종교든 철학이든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고 극복하는 방법을 안내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극복은커녕 주술적 권력이 되어버린 경우를 주변에서 종종 마주한다. 그래서 보통사람이 “기억된 역사는 물론이고 어떤 인물이나 미디어의 말과 글 혹은 이미지를 사실(fact)로 믿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더구나 수사(rhetoric)는 실제로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 사실 자체는 말이 없는 법이고, 그것의 어디까지가 실재(reality)이고 어디까지가 수사(rhetoric)인지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정치적 수사는 정치적 현실을 창조하고, 믿음 체계를 조직하고, 결정의 주요한 근거를 제공하기 마련이다. 정치인과 언론의 문제적 언어는 기본적으로 과잉현실과 레토릭이 생산한 가상적 현실과 구성적 실재를 내포한다. 게다가 언론이 그것을 시민에게 전달할 때는 또다시 모종의 목적을 위해 프레임을 짜고(framing) 가짜 뉴스(fake news)를 만들게 된다.

이상이 화자의 정체성, 구성된 현실, 기억과 레토릭, 프레임과 가짜 뉴스 등이 작동되는 메커니즘이다.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일부 정치인의 거짓말과 언론의 가짜 뉴스가 마치 ‘백색 테러’처럼 준동하고 있는 듯하다. 김정배 (사)문화도시울산포럼 이사장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