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주향 전 경상남도의회 의원

10년 전, 국립산업기술박물관을 울산으로 유치하기 위한 시민운동에 참여했던 시간들이 역력하다. 2011년 11월16일 지식경제부와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이 서울 용산에 1조원을 투자하여 박물관 등을 포함한 세계 최대규모의 ‘산업기술복합문화공간’을 건립한다는 연구결과 발표를 접한 울산 시민들이 울산 유치를 주장하며 일어섰다. 정부가 울산이 모르게 조용히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분노가 치솟았다. 필연코 울산에 건립되어야 된다는 열망으로 가득 찼다.

1주일 만에 3000명이 넘는 시민들이 SNS를 통하여 시민운동본부와 뜻을 같이하며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함께 매주 길거리로 나가 서명운동 봉사를 했었던 순간들을 잊을 수가 없다. 산업수도 울산에 국립산업기술박물관을 유치하기 위한 30만 범시민서명운동이었다. 2012년 12월13일에는 울산대 학생들이 앞장선 자전거원정대가 7일간의 국토종단에 나섰다. 울산상공회의소를 출발하여 경주, 대구, 칠곡, 영동, 대전, 청주, 평택, 수원, 과천, 여의도, 국회의사당 등을 돌며 국립산업기술박물관 울산유치의 당위성을 부르짖는 모습이 늠름하고 힘차보였다. 국립산업기술박물관 울산건립 왜 필요한가? 라는 제목으로 수차례 토론회가 있을 때마다 관심을 갖고 적극 참여하였다. 마침내 총선공약 대선공약에 채택되어 희망이 넘쳤다.

나는 1973년도에 남편을 따라 부산에서 울산으로 이사 왔다. 당시의 울산인구는 30만이었고 항상 공해로 회색안개가 끼어 있고 매캐한 냄새에 코를 막곤 했다. 울산은 타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의 중화학공업 중심 도시가 되었다. 공해도시로 알려진 대신 부자도시로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그래서 노동의 피로를 풀기 위한 술문화와 밤문화가 크게 발달했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생활예술문화는 불모지라 불리는 불명예스러운 시간도 상당히 길었다. 그 후 많은 노력으로 생태도시로 발전했다.

이사 올 당시만 해도 딱 10년만 울산에서 돈을 벌어서 부산으로 다시 돌아가서 살 요량이었지만 사는 동안 정들고 돈벌이도 괜찮고 살기 좋은 도시라 부산으로 다시 돌아 갈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울산이 고향이 되었고 세 자녀 모두 울산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을 시켰다. 울산사람들 대부분이 나와 같은 생각으로 정주인구가 되어 120만 도시로 성장했고 부자도시가 됐다.

산업과 공업으로 웃고 울던 삶의 이야기와 태화강의 기적도 일어났다. 도시가 급속히 성장해온 발걸음에는 수많은 역사자료와 산업유물, 명장들의 경험과 노하우가 쌓여있다. 지금도 변함없이 살아 숨 쉬고 우렁차게 돌아가고 있는 산업의 현장이 그대로 있다. 그래서 울산은 도시 전체가 산업박물관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어렵게 유치한 국립산업기술박물관 건립예산이 절반, 반의반으로 줄더니 급기야 10분의 1 이하로 쪼그라들었고 이마저도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통과하지 못하여 폐기되고 말았다. 희망과 기대감에 가득 찼던 모든 시간들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전후 폐허가 된 국토를 단 50년 만에 다시 세우고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대한민국의 산업을 기록보존하고 미래 100년을 선도할 국립산업기술박물관은 단순한 역사박물관이 아니라 대한민국 미래 산업의 청사진이고 전 세계 미래 산업기술의 심장이 돼야 한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분석하고 생산하는 빅데이터 시대 세계 최대, 최상의 산업빅데이터가 울산에 넘쳐나고 있다. 그 가치와 생산력은 엄청날 것이다. 그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는 곳은 울산에 건립된 국립산업기술박물관 외에는 대안이 없다.

울산광역시가 3억원의 예산을 확보하여 ‘국립산업기술박물관 건립’을 재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제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울산광역시를 중심으로 5개 구군, 당을 초월한 국회의원, 시의원, 울산의 모든 시민이 함께 똘똘 뭉쳐 강력한 의지로 반드시 건립해야 할 시설이다. 성주향 전 경상남도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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