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지도자
국내 항일투쟁의 선봉·울산의 자랑
발자취·공적 재조명 계승하는 한해로

▲ 이상찬 울산시 문화관광체육국장

올해 삼일절은 35년 치욕의 역사 속에서 온 몸을 바쳐 항일독립운동을 한 울산연고의 순국선열의 뜻과 정신을 잇기 위해 102분의 선열의 이름이 새겨진 ‘울산항일독립운동 기념탑’을 제막하는 뜻깊은 행사가 함께 치러졌다. 그리고 얼마 전 동구에서는 울산항일 운동가들의 교육의 산실이었던 ‘보성학교 기념관’도 개관하는 의미 있는 행사도 있었다. 20세기 시작과 함께 나라를 잃은 우리는 가열차게 싸우며 목숨 바친 선조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세계에서 자랑할 만한 국가가 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많은 순국선열 중 ‘고헌 박상진’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우리고장 항일독립운동가다. ‘박상진’, 그는 일제식민지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지도자이자 선각자였다. 일제에 강제 병합되고 서슬 퍼런 헌병경찰 통치 속에서 항일투쟁은 그야말로 목숨 건 투쟁이었다. 많은 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투쟁을 준비할 때 박상진은 국내 항일투쟁의 선봉장에 섰던 것이다.

필자가 보건대 박상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두 분은 스승 왕산 허위와 중국 신해혁명의 쑨원이라 본다. 허위문하에서 한학을 배우고 스승의 권유로 양정의숙에서 신식 교육을 익힌 때가 그의 나이 10대, 20대 초반이었다. 1908년 13도 창의군과 서울진공작전 실패로 일제에 잡혀 서대문형무소 1호 형장으로 순국한 스승의 시신을 수습한 자가 제자 박상진이다. 판사직 집어치우고 스승의 모습을 보며 그 길을 따라 항일투쟁을 준비한다. 고헌은 국내와 중국대륙, 만주, 연해주를 오가며 투쟁방안을 모색하고 함께할 동지들을 규합한다. 1913년 쑨원을 만나 청의 멸망과 중화민국이라는 공화제 수립을 보면서 식민지 굴레에서 벗어나 우리나라가 지향할 정치체제(군주제에서 민중심의 공화제)에 대한 생각과 독립투쟁방법을 익힌다. 여기서 탄생한 것이 군대식 항일무장투쟁의 ‘대한광복회’(실제는 ‘광복회’임. 1915년 7월)다.

기미년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전국에 울려 퍼지기 1년여 전 1918년 1월 광복회 충청지부는 악덕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하지만 광복회가 일제에 알려지며 와해되는 계기가 되고 만다. 앞서 광복회는 1917년 11월 경북 구미 친일부호 장승원과 1916년 전남 벌교부호 서도현을 처단한다. 광복회는 계몽주의 계열과 의병투쟁 계열을 아우르는 전국 단위 최초의 항일독립단체로써 박상진이 총사령으로 추대되고 해외거점인 만주지역의 지부장이 부사령을 맡아 1대 이진룡 사형 후 양정의숙 동료이자 1920년 청산리전투 대승을 이끈 김좌진이 2대 부사령을 맡았던 조직이었다. 광복회는 군대를 양성하여 일제와 싸울 군사력을 기르는 것이었는데 거점마다 상점을 설립하여 연락기관을 구축하고 군자금 모집이 급선무였다. 친일파 처단은 민족적 각성과 동시에 의협투쟁이었던 것이다. 광복회의 실질적인 투쟁기간은 불과 채 3년이 안되지만 일제에게는 두려움의 존재였고 일제는 3년 넘는 구속도 부족해 결국 1921년 8월 11일 사형을 집행한다. 그의 나이 38살, 동지 김한종 등 5명과 함께 생을 마감한다.

올해가 박상진 서거 100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시는 순국 100주년은 맞아 기념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다. 고헌의 독립운동 정신의 전국적인 확산과 사회적 가치를 고양시키기 위해 민관이 함께하는 범시민적 행사와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마련 중이다. 짧은 생(生)을 마감하였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대의(大義)를 실천하고 행동을 보인 존경받아 마땅한 울산의 자랑 박상진. 그의 발자취와 공적을 재조명하고 계승하여 시민 모두가 기억하는 한해가 되길 바라본다. 이상찬 울산시 문화관광체육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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