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p 차이로 역전극 노무현 드라마
20년 지나 36세 제1야당 대표의 탄생
신드롬을 넘어 실천·결실 맺길 기대

▲ 김두수 서울본부장(부국장)

1995년 7월부터 국회를 출입해온 기자가 서울 여의도 정글밭에서 ‘감동의 순간’을 맛본 것은 지금까지 크게 두번이다. 첫번째는 2002년12월19일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드라마이고, 두번째 큰 감동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36세 이준석이 야당 당수에 오른 순간이다.

20년전 노무현 드라마는 정의와 공정, 지역감정의 벽을 허무는 시대정신으로 철저하게 무장된 노무현만의 전투였다.

16대 대선가도를 부분 복기하면,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 당내경선부터 험난했다. 정동영, 이인재, 한화갑 등 기라성 같은 경쟁자들과의 대전투에서 장인의 좌익활동과 관련해 음모론과 색깔론으로 집중포화를 맞은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아내를 버려야 하느냐”며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단칼에 당내 여론을 뒤집었다. 대선후보로 등극한 직후엔 1.6% 바닥세로 출발했다. 종착역까지도 여론 주도권은 대법원장과 감사원장을 지낸 보수의 간판 ‘대쪽’ 이회창이었다.

당 안팎에서 선수교체론까지 제기되면서 외우내환에 직면한 노무현은 군소정당인 국민당 대표 MJ(정몽준)와 후보단일화를 꾀하면서 극적반전을 시도했다. 우여곡절을 거친 뒤 여론조사 경선끝에 간발의 차이로 노무현이 이겼다.

하지만 여의도 정치권과 국민들 사이에선 ‘설마’가 절대 다수였다. ‘대통령 노무현’가능성은 희미한 반딧불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선거 당일 오후 6시. 방송출구조사 결과는 천지를 진동시켰다. 0.7%p(57만표) 차이의 역전극으로 ‘노무현 드라마’를 연출해 집권에 성공했다.

집권 5년 내내 긴장의 연속이었다. 야당 및 보수언론과 격돌하면서 설화도 없지 않았다. 오죽 힘들었으면 “대통령 그만 두고 싶다”라고 넋두리를 폈을까.

그럼에도 노무현의 큰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차떼기 논란’등 돈선거를 원전 차단하는 ‘정치자금법’과 선거공영제라는 큰 결실도 거뒀다. 집권 초반 금이 간듯한 가파른 한미동맹 상황에서도 한미FTA 체결 등 ‘실사구시’ 국정철학은 수많은 공과 가운데 지금까지도 살아 숨쉬고 있는 이유다.

이준석의 제1야당 대표 등극 역시 한편의 감동 드라마다. 박근혜 키즈로 정치권에 입문한 그에게 ‘탄핵동조’라는 올가미를 씌우려는 중진 및 극우 세력들과 정면으로 맞딱뜨렸다. 당 안팎의 여론이 출렁였지만 피하지 않았다. 박근혜 보수의 심장부 TK(대구경북)에서 “박근혜 탄핵은 정당했다”고 도끼로 자기 발등을 찍었다. 불리하면 변명과 거짓으로 점철된 여의도 문법의 판을 단칼에 갈아 엎은 대사건임엔 틀림없다.

그는 스스로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고 했다. 맞다. 여론은 준엄하다. ‘따릉이’ 출퇴근의 신선함과 워드프로세스의 자격시험 도입도, 공천심사 투명성을 위한 토론 배틀도 좋다. 하지만 정당은 이벤트와 무지개 빛깔로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 아니다. 제1야당의 당수는 정부와 여당의 잘못된 정책을 추상같이 비판하는 역할 뿐만이 아니다. 국민들이 이준석에 거는 기대는 젊고 역동적인 콘텐츠와 용기로 거짓말과 위선정치, 내로남불, 국민갈등 조장, 특권에 기대려는 낡은 행태를 과감하게 바꾸는 한편 국민의 삶과 질의 개선을 위한 실천과 비전에 있다. 여기엔 단순한 실수와 실언, 헛발질조차 너그럽지 못한 가파른 상황이다.

“이준석은 역시 얼라(아이의 영남사투리)다.” 이런 구설이 초반에 반복되는 순간, 이준석 신드롬은 미완의 작품으로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다. ‘노무현 신드롬’과 ‘이준석 신드롬’의 대국민 동의어와 반대어 가운데 ‘동의어 만으로’ 실천과 결실을 맺는 멋진 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노무현 신드롬은 과거사다. 하지만 이준석 신드롬은 현재와 미래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김두수 서울본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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