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내고향 한실마을과 암각화(상)
대곡천 일원 한실마을에서 태어나
70 평생을 일대서 살아온 박성철씨
암각화라는 말 자체도 모르던 시절
바위 그림 중 호랑이만 유독 선명해
마을사람들은 ‘호랑이산’으로 불러
어릴적 물장구 치고 놀던 곳이지만
암각화 코앞은 신령한 기운 느껴져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천전리각석
지금보다 훨씬 널찍한 바위 위에서
시체 태우던 기억 아직도 또렷해
실제로 1970년대까지 화장 이뤄져

▲ 지난 8일 방문한 반구대 암각화 현장. 유치원생들이 현장수업을 위해 암각화 전망대로 들어가는 데크를 걸어가고 있다. 박성철씨는 그 나이때부터 대곡천 주변을 누볐고, 지금도 암각화와 함께 살고있다고 했다.

국보 ‘반구대 암각화’가 학계에 보고된 지 올해로 50년이다. ‘천전리각석’은 그보다 한해 빨리 보고됐으니 올해 51주년이 됐다.

두 국보가 세상에 알려진 지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국보의 존재가치는 물론 두 기의 국보를 낀 대곡천과 그 주변 마을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사연댐 건설로 학교와 고향집을 떠나야했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당시 대곡천을 떠난 뒤 이 곳을 찾아오지 않은 이가 적지않다. 수십년을 외지에서 살다가 최근에서야 다시 돌아 온 사람도 있다.

이런 가운데 본보는 지난 8일 특별한 사람을 만났다.

어린 시절 그 곳 한실마을에서 태어난 뒤 환갑을 지나 칠순을 앞둔 지금까지도 한결같이 그 주변을 맴돌며 한평생 대곡천을 바라보며 산 사람이다. 평범한 주민이자 반구대 암각화를 지키는 대곡리주민보존회의 감사를 맡고있는 박성철(66)씨가 지난 70년의 흘러간 시간을 들려줬다.

그의 이야기를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각석’ ‘대곡천의 잊혀진 지명과 설화’ ‘사연댐 건설과 마을사람들’로 구분해 소개한다.
 

▲ 박성철씨의 고향 한실마을 옛 사진.  (서진길) 수록.
▲ 박성철씨의 고향 한실마을 옛 사진. (서진길) 수록.

◇“암각화가 뭔지도 몰랐지”

박성철씨는 한실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박씨가 고향집을 떠나야 했던 건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사연댐이 만들어지면서 급하게 이사를 해야했다. 일찌감치 집을 비우고 외지로 떠난 사람이 많았는데, 박씨집은 어떤 일인지 이사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가장 늦게 마을을 떠나는 부류가 됐다. 그러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제대로 거처할 공간을 장만하지도 못한 채 부랴부랴 세간을 뺏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은 원래 있던 고향집 보다 훨씬 높은 산등성이, 남의 밭을 사서 그 곳에 작은 집을 새로 지었다. 그 곳에 살며 새로 이전한 대곡국민학교를 졸업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다 마쳤다. 이후에는 청년기를 보내며 결혼도 했다. 현대그룹 근로자가 된 뒤에도 주말에는 부모가 사는 고향집을 늘 왕래했다. 장년이 되고부터는 노모가 홀로 사는 고향집을 더 자주 찾아야 했다. 그렇게 오가면서 농사까지 짓게되니 주말은 꼼짝없이 대곡천 주민처럼 살아야 했고, 회사를 퇴직한 뒤에는 아예 예전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한실마을 주민이 되어 지금까지 살고있다.

“암각화가 뭔지나 알았겠나. 마을사람들 대부분 몰랐을 걸. 바위에 그림이 있다는 정도는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지는 안했다. 요새들어 고래다, 멧돼지다, 노젓는 사람이다, 어떻다 하는데. 사실 말이지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지 맨눈으로 봐서 제대로 알겠나. 그래도 암각화 중간에 호랑이 그림만큼은 선명했다. 멀리서 봐도 그건 보였거든. 눈 밝은 사람은 물 건너서도 호랑이가 보인다했지. 그래서 우리 어릴 적에는 지금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절벽을 ‘호랑이산’이라고 안했나. 암각화라는 말은 아예 몰랐다. 절벽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멱 감던 큰 보가 하나 있었는데, 그거 때문인지 마을어른들이 ‘큰 보 안 호랑이상’이라고 하던 말은 들어봤다.”

지금의 암각화 전망대가 있는 자리의 바로 밑에 박씨네 논이 있었다. 박씨는 보리타작을 할 무렵 보릿단을 양쪽 팔에 끼고 물장구를 치면서 호랑이산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하지만 바위면에 가까이 갈 수는 있어도, 바위면에 올라 설 수는 없었다.

지금은 반구대 암각화 아랫면이 말갛게 정리돼 있지만, 당시만해도 모래와 흙이 쌓여있고 제법 굵은 나무까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바위그림의 위치는 꽤 높았다. 물살도 세고, 풀과 나무도 자라고, 바위면의 높이가 상당해 열살 꼬마가 상륙하기에 녹록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는 쫌 무서웠다. 물도 시퍼렇고, 흔한 말로 물 속에 살기가 있다고 했다. 그래선지 어른들이 그 곳을 좀 경외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 신령스럽다고나 할까. 아무튼 뭔 지는 잘 몰랐으나, 어린 나이에도 보통 기운이 아니라는 정도는 느끼고 알았던 거지.”

◇“천전리각석은 화장터였어”

한실마을 사람인 박씨는 마을에서 가까운 반구대 암각화에 비해 상류쪽 천전리각석에 얽힌 추억은 많지 않다. 각석은 반구마을과 훨씬 가까웠다. 그래도 반구대에서 천전리까지 올라가는 중간 어귀에 둥근 돌이 넓게 깔린 개울 옆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일화는 떠오른다. 천전리각석은 박씨에게 ‘시체를 태우던 화장터’로 기억된다. 실제로 1970년대까지 그 곳에서 화장이 이뤄졌다고 한다.

▲ 70년 가까이 암각화를 지켜봐 온 박성철씨. 반구대 암각화를 지키는 대곡리주민보존회 감사를 맡고 있다.
▲ 70년 가까이 암각화를 지켜봐 온 박성철씨. 반구대 암각화를 지키는 대곡리주민보존회 감사를 맡고 있다.

“전염병이거나, 너무 일찍이거나, 또 안좋게 죽다보니, 장례 없이 바로 화장을 했던 게 아닌가싶다. 소나무를 깔고, 시체를 얹고, 그 위에 또 나무를 얹어서 불태웠다. 한참을 태우는데, 뼈만 추려 쇳절구에 빻았다. 가루는 대곡천에 흘려보냈을 수도 있고, 그저 표안나게 처리를 했겠지.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도 그래 했던 것 같다. 시꺼먼 연기는 멀리서도 보였다. 영락없이 화장이다. 동네 선배들이 ‘오늘은 어느집 누가 꺼슬리는공?’하고 반농담을 하고 그랬다.”

박씨는 천전리각석 아랫부분의 표면이 쩍쩍 갈라져 보이는 이유도 오랜 세월 이뤄진 화장 탓일 것이라고 했다. 각석 바로 앞 너른 바위에서 큰 불을 피우니, 화기와 불똥이 바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어른들 말씀으로, 김유신 장군같은 신라화랑들이 칼싸움도 하고, 활도 쏘고 했던 곳이라고 했다. 지금 같으면 ‘군 훈련소’라고. ‘천전리각석’이라는 말을 듣고도 한참동안 대곡천에 그런데가 또 따로 있는 줄 알았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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