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지자체·전문가 요구 묵살 안돼
소장작 한데 모은 서울 건립계획 철회
근대미술관·균형발전 모두 관철해야

▲ 정명숙 논설실장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7일 ‘이건희 미술관’ 건립계획을 발표했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부지와 국립현대미술관 인근 송현동 부지 2곳 중 하나에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관’을 만들어 2027~28년에 완공하겠다는 것이 정부 방침이다. 미술관 유치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30여 지방자치단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에서도 난리가 났다. 지자체들은 “또 서울이냐”며 “국토균형발전의 기회를 날려버렸다”고 아우성이다. 서울에서는 677명의 전문가들이 ‘국립근대미술관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어 “근대미술관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성토하고 있다.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의 기증품은 2만3000여점이다. 대부분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2곳에 나눠서 기증했다. 광주시립미술관에 30점을 비롯해, 전남도에 21점, 대구에 21점, 양구 박수근미술관에 18점, 제주 이중섭미술관에 12점을 전달했다. 삼성의 안목으로 작품의 맥락에 따라 적확(的確)한 미술관을 골라 분산을 시도한 것이다. 내용이나 규모를 무시한 채 ‘이건희 소장품관’이란 이름으로 한곳에 몰아넣을 이유가 없다는 반증이다.

이건희 미술관의 지방 건립은 수도권 집중화와 지방소멸을 극복하는 국토균형발전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지방도시의 문화소외현상이 지방소멸의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안다. 2019년 수도권 인구가 전체 인구의 50%를 넘어섰다. 국립문화시설의 48%가 수도권에 자리한다. 국립중앙박물관 민속박물관은 말할 것도 없고 4개관의 국립현대미술관은 청주관을 제외한 3개관이 서울에 있다. 올해 완공될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인천에, 2024년에 지어질 국립한국문화관은 서울에 건립된다. 울산은 우리나라 7대도시이고 수십년간 1인당지역총생산(GRDP)이 가장 높은 도시임에도 국립문화시설은 단 한곳도 없다. 경제수준이 높아지면 문화적 욕구는 절로 높아진다. 지방도시의 획기적 문화 인프라 구축 없는 국토균형발전은 공염불이다.

서울지역 전문가들이 요구하는 근대미술관 건립도 필요하다. 이건희 소장품을 통해서 비로소 비어 있는 우리 미술사를 꿰맞출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고대미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근·현대미술은 4개의 국립현대미술관에 나눠 전시하고 있다. 단독 근대미술관이 없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근대미술품 소장작이 겨우 1000여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최근 이왕가미술관에서 넘겨받아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2000여점을 합쳐도 근대미술관을 만들기엔 왜소하다. 그런데 이건희 기증작에는 근대미술품이 1000여점이나 들어 있다. 작품성도 빼어나다. 비로소 우리 미술관 역사에서 고대-근대-현대의 균형을 찾을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전문가들이 국립근대미술관을 요구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뮤지엄으로 통칭하는 외국에서는 미술관을 대개 시대별로 나눠놓는다. 관광코스로도 인기인 독일 뮌헨의 아트지구는 18세기 이전 회화작품을 소장한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 1836년), 18세기 말~20세기 초 근대회화를 소장한 노이에 피나코테크(Neue Pinakothek, 1853년), 현대미술관인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Pinakothek der Moderne, 2002년) 등 시대별로 나눠진 3개의 국립미술관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순서대로 감상하면 초·중·고 미술시간에 배운 서양미술사를 온전히 경험하게 된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오르세-퐁피두도 마찬가지다.

2만3000여점의 이건희 기증작은 미술관 유치로 도시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지방도시의 요구도, 박물관학에 따른 분류로 우리나라 미술사를 다시 정리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주장도, 모두 수용하기에 충분하다. 근대미술만 모아서 용산이든 송현동이든 서울에 국립근대미술관을 짓고, 나머지 작품들로 지방도시 한두곳에 이건희 미술관을 만들면 될 일이다. 문체부가 괜한 옹고집을 부릴 이유가 하나도 없다. 기증작을 한데 모은 ‘이건희소장작관’의 서울 건립은 반드시 철회해야 한다.

정명숙 논설실장 ulsan1@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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