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없다. 스승도 없다.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지도자도 없다. 더구나 올바른 의견을 제시하고 사회를 바로 잡아갈 오피니언 리더는 더더욱 없다. 이것이 작금의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구의원, 시의원, 국회의원 모두가 우리의 지도자들이다. 동장도 구청장도, 도지사도 모두가 그 지역의 어른들이어야 한다. 교사도, 장학사도, 교장도, 교육감도 모두가 우리들의 스승들이다.

 그러나 모두들 어디에 있는지 어른도 스승도 지도자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어찌 그리 각 분야의 전문가도 많은 지 혀를 찰 지경이다. 사회 비평가, 정치 평론가, 문화 비평가, 각종 경제 전문가, 종교 지도자 등등 어른도 되고 스승도 됨직한 사람들이 수없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스승, 어른이라고 불러 주려 하지 않는다.

 이러고도 우리가 선진 사회를 창조할 수 있을까? 이러고도 우리가 다른 나라에 대하여 또는 세계에 대하여 져왔던 빚을 갚을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자본 주의 말기 형태의 깊은 수렁에 젖어 들고 있다. 남을 인정하지 않고, 헐뜯으며, 자기 이속만 챙기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이렇게 자기만을 위주로 하는 사회에도 의인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들은 병든 사화에 변화를 가져 오고 새소망을 갖도록 계기를 마련하곤 했다. 나는 그러한 사람들이 지금 곧 나타나리라 믿고 있다.

 그들은 사회의 공인 받는 지식층이어야 하고 여론을 이끌 수 있는 능력있는 지도자라야 한다. 누구나 병든 사회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계층의 지도자가 더러 있겠지만 필자의 단견으로는 이 시대 우리 사회를 개혁할 사람들은 바로 언론인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언론인 중에서도 남의 존경을 받는 중견 기자, 차장, 부장, 편집국장이라 불리는 신문이나 방송의 편집국 사람들이 그런 일을 맡아 주어야 할 것 같다. 그들이 가장 새롭게 빨리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을 접하는 분들이고 가장 합리적이고, 비판적 시각을 기진 분들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1930년대의 퓨리쳐가 미국 언론인에 호소하고 자본 주의의 해독을 합리적 지성으로 재무장 시켰듯이 우리의 언론인도 한번 팔 걷어 부치고 나설 때가 된 것같다.

 오늘의 우리 언론은 몇 가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같은 내용의 중복 보도다. 어느 방송 어느 신문을 보아도 같은 얘기만 반복하고 있다.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신속 정확성도 별로 없다. 어느 신문이나 방송도 같은 사건의 얘기들이다.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발 방지에 있을 터인데, 흥미에 초점을 맞추어 시청자를 자극하고 있다. 본질을 비껴 가고 있는 것이다.

 부정부패에 대한 보도 태도도 그렇다. 실증이 날 정도의 같은 내용 반복이다. 이를 모를 데스크는 아무도 없을 터인데 왜 그럴까. 시간만 떼우면 된다는 말인가. 국가의 체면이나 이익에 관한 기사도 고려돼야 할 터인데 하는 아쉬움도 있다. 사건의 경중을 구별 않고 본말을 뒤집는 경우도 더러 보인다. 솜 한덩어리와 금 한 덩어리는 다른 것이다.

 국가 안보의 책임을 졌던 경찰 간부가 해외로 도피해도 언론의 보도 자세는 그 사명을 제대로 해 내는 것 같지 않다. 그 많은 특파원들은 모두 무엇을 하는가. 청와대 비서관이, 아태 재단의 간부가, 대통령의 아들이 협잡배와 놀아 나도 몇 줄의 기사만 쓰면 그만이란 말인가. 언론은 그 원인을 규명하고 날카롭게 파 헤쳐야 한다. 그리고 이 땅에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도록 호소하고 계도해야 한다. 누군가 정말 정의를 위해 싸우는 투사가 되어 주어야 한다.

 얼버무리고, 편안함에 빠져 기사 정리에 게을리 말아야 한다. 끝까지 뒤를 좇는 기자 정신을 독자들은 기대한다. 특종을 잡아 명예를 높이는 전문 기자가 제자리를 차지하고, 눈치보지 않는 올곧은 기자가 필요한 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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