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 공적심사로 저평가된 박의사
법개정 아닌 누락공적 추가심의로
광복절에 맞춰 서훈 상향조정할 것

▲ 이채익 국회의원(국민의힘·울산남갑)

“항상 의열의 띠를 두르고 나라를 위해 도적을 토벌하고 백성을 위해 더러운 것들을 제거하시다가 도중에 왜구의 손에 무참히 극형을 당하신 울산의 박상진씨가 제외됨은 참 잘못되었고 끝없이 원통합니다. 당시의 실천한 행동을 보면 상지상(上之上)의 으뜸 서훈으로 봉해야 합니다.”

1962년 3월초, 정부의 독립유공자 선정 명단에서 고헌 박상진 의사가 제외되자 고령 박씨 족친인 박진태씨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직접 보낸 서신 중 내용이다.

1962년 2월말, 박정희 정부는 5·16군사정변에 대한 지지 확보 차원에서 3·1절 계기 독립유공자 208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당시 1등급인 대한민국장에 18명을 서훈했는데 백범 김구를 비롯해 김좌진, 윤봉길, 안중근, 최익현 등이 선정됐다.

그러나 단 4일 간 4차례 회의로 졸속 선정하다 보니 반드시 포함돼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빠져 사회적 논란이 거셌다. 위 서신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다. 박 선생은 이듬 해인 1963년, 3·1절 계기 독립유공자 명단에 포함되었지만 ‘상지상의 으뜸서훈’이 아닌 ‘3등급 독립장’에 추서됐다.

필자는 지난 11월 정부포상을 담당하는 행정안전부 상훈담당관 및 울산시 등과 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행안부는 박상진 의사의 상훈을 변경하는 근거를 추가하는 법 개정보다 추가 서훈이 현실적이라고 조언했다. 당시의 공적심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국가보훈처와 과거 포상 주무부처였던 문교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에 심사관련 자료 일체를 요청했다. 그 결과 공적조서 및 서신이 1부씩 제출됐다. 달랑 한 장에 불과한 공적조서에 담긴 박 의사의 공적은 너무나 빈약했다. △1915년 광복단 조직 단장 △1917년 장승원 살해 △1918년 충남 아산군 도곡면장 박용하 살해 지휘 △피체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집행 등 네 가지에 그쳤다.

박상진 선생에 대한 정부의 공적심사가 부실했다는 결정적 증거였다. 부실 심사 외에 박 선생의 공적이 저평가된 배경에는 광복회에 의해 살해된 친일부호 장승원의 셋째 아들 장택상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대 유력 정치인이었던 장택상이 아버지를 암살한 광복회에 원한을 품고 해방 이후 관련 기록을 지우려 했다는 것이다. 미군정 수도경찰청장을 비롯해 이승만 정권의 국무총리, 박정희 군부시절 자유당 총재 등을 역임한 장택상이 광복회의 재건 및 광복회 기념비 건립을 방해했다는 증언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박상진 의사의 공적이 다수 누락된 것을 비롯해 공적이 평가 절하된 정치적 배경을 입증하면 그동안 발굴된 공적으로 서훈을 추가하면 된다. 이미 유관순 열사와 홍범도 장군도 추가 공적으로 1등급 장을 서훈한 바 있다. 국가보훈처와 논의한 결과, 광복절 서훈을 목표로 추진할 계획이다. 우선 2월 말까지 공적심사 신청을 완료해야 한다. 그동안 새롭게 발굴한 공적을 비롯해 박상진 의사의 공적 재조명이 왜 필요한지를 증명해줄 자료들을 빠짐없이 준비해야 한다.

고헌 박상진 총사령이 이끈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의열투쟁을 전개하여 이후 3·1운동과 항일독립운동을 이끌어 낸 견인차 역할을 했다. 특히 박 의사의 부친 박시규 선생이 쓴 제문(祭文)에서 중국 및 인도 등에서도 박 의사의 활동이 집중 조명되는 등 민족정기 선양에도 공헌하였다는 내용도 포함돼야 한다.

앞으로 박 의사의 유족들과 추모사업회, 울산시 등과 긴밀하게 협의해 광복절 서훈을 반드시 이끌어 내려 한다. 이는 대한민국의 올바른 역사관 확립을 위해서라도 기필코 이뤄내야 할 역사적 과제이기도 하다. 울산시민 모두가 박 의사의 서훈승격을 위해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야 할 때다. 2022년, 울산을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 도시로 우뚝 세우는 원년으로 만들자.

이채익 국회의원(국민의힘·울산남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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