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이종남 변호사와 울산 항일운동

일제강점기 울산에는 조형진·강철·권우락 등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구속된 애국지사들이 많았다. 특히 3·1운동 후 각 지역마다 청년회가 조직되면서 많은 청년이 구속되었다. 구속되면 조사를 거쳐 재판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도 변호사가 있어 재판받는 동안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1928년 6월25일 공판이 있었던 경남청년연맹 재판과 1929년 4월20일 울산군청년연맹(蔚山郡靑年聯盟) 사건 재판 등 울산청년들의 재판을 보면 이종남(李鍾南) 변호사 이름이 자주 거론된다.

실제로 이 변호사는 일제강점기 울산 청년들을 위한 재판에서 변호를 자주 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그의 이름이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종남 변호사는 교육자 이규현 옹의 3남이다.

조선 조 말 울산에는 개진학교·영명학교·일신학교·개운학교가 설립되는데 개진학교는 울산초등 전신으로 울산의 중심 지역인 북정동, 영명학교는 언양초등 전신으로 언양, 일신학교는 병영초등 전신으로 병영, 개운학교는 남목초등 전신으로 남목에 각각 세워졌다.

그런데 이중 개운학교 설립에 참여했던 인물이 이규현 옹이다. 이 옹은 학교 설립에만 참여하지 않고 스스로 이 학교 2대 교장을 지냈다. 이 옹이 당시 이처럼 교육에 헌신한 것은 어지러운 나라를 구하는 길이 교육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당시 노후된 울산향교의 유지·보수에도 참여하는 등 유학자로 선각자의 길을 걷기도 했다.

이 옹은 종림·종준·종남 등 3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중 장남 종림은 아버지 유지를 받들어 나중에 개운학교 교사로 활동했고 3남 종남은 일제강점기 판사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항일운동가 변론에 앞장섰다. 이들 둘보다 차남 종준의 활동은 눈에 띄지 않는다.

종림의 교사 활동은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보도가 될 정도로 활발했다. 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10일 자 신문에는 ‘경상남도 울산군 동면 남목리에 사는 이종림, 강두영, 장연화, 장남기씨가 그 동리에 개운학교를 설립하고 열심히 교수를 할뿐더러 또 대창야학교를 설립하였는데 학도가 20여 명에 달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중 강두영은 개운학교 3대 교장을 지냈다.

장남 종림이 이처럼 교육에 헌신한 것과는 달리 3남 종남은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종남은 1887년 12월 울산 남목에서 출생했다.

종남의 경력 중 학력에는 의문이 많다. 그는 일제강점기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뒤 국내에서 판사와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런데 메이지대에 입학하려면 반드시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것인데 그러나 그가 언제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 기록이 없다. 친인척 중에도 그가 메이지대에 입학하기 전 어느 학교에 다녔는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

현재 남목에는 그의 문중에서 세운 그의 공적비가 있다. 그런데 이 비석에도 종남의 학력과 관련 ‘약관에 청운의 뜻을 품고 도일한 후 메이지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귀국 후 법조계에 몸을 담았다. 그리고 경주·광주·부산·진주에서 판사를 역임한 후 진주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라고만 써놓았을 뿐 메이지대 이전의 학력은 없다.

종남이 1887년생인 것을 생각하면 그가 어릴 때 남목에는 서당이 많아 서당을 다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등교육을 조선에서 받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일본으로 가 일본에서 수학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종남이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이력서를 보면 메이지대를 졸업했던 때가 1913년이다. 가족들이 가진 메이지대 졸업 앨범을 보면 그와 함께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던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가 있어 종남이 가인과 메이지대 동기임을 알 수 있다.

가인은 전북 순창 출신으로 1887년 태어나 종남과 나이가 같다. 가인은 일제강점기 변호사로 활동하는 동안 항일운동 관련 각종 사건을 자청해 변론했다.

종남이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서기를 거쳐 조선총독부 판사로 임용된 해가 1917년이고 이때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 판사로 부임했다. 판사로 임용될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받았다는 칼을 후손들이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1년 뒤 광주지방법원 판사를 거쳐 부산지방법원 판사로 온 때가 1920년이다.

부산에서 1년 남짓 판사 생활을 하다가 변호사가 된 것을 생각하면 그가 판사로 활동한 시기가 5~6년에 지나지 않는다. 종남의 판사 생활이 이처럼 짧은 것을 두고 그의 후손들은 “어른이 재판 과정에서 조선인 편을 들다 보니 일본 법관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법복을 빨리 벗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재판 기록이 남은 것이 없어 실상은 알 수 없다.

▲ 울산 동구 남목 출신의 이종남 변호사는 일제강점기 울산 출신 항일운동가를 위한 변호에 앞장섰지만, 진주에서 주로 변호사 활동을 해 울산에서는 그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의 산소가 현재 남목 쇠평마을에 있다.
▲ 울산 동구 남목 출신의 이종남 변호사는 일제강점기 울산 출신 항일운동가를 위한 변호에 앞장섰지만, 진주에서 주로 변호사 활동을 해 울산에서는 그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의 산소가 현재 남목 쇠평마을에 있다.

대신 종남이 우국지사 안희제 선생의 친동생인 안국제씨의 딸을 그의 장남 승우의 부인으로 맞이한 것을 보면 그가 애국 사상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승우는 이학박사로 국내에서 동국대학교 학장을 지낸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작고했다.

이와 관련 종남의 비석에는 “공이 우국지사 백산 안희제 선생의 친동생 안국제씨의 따님을 장자 부로 맞이하였다는 점에서 공의 시대적 애국충정의 일단을 미루어 생각할 수 있다”고만 기술해 놓고 있다.

백산 선생은 일제강점기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하면서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많이 보냈다. 따라서 문중은 종남이 일제강점기 며느리를 통해 그의 큰 아버지인 백산 선생에게 적지 않은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관련 문중 사람들은 “종남 어른이 일제강점기 며느리를 통해 백산 선생에게 적지 않은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었고, 그 증서를 후손들이 보관해 왔다는 얘기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어 최근까지 증서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 증서를 찾지 못해 안타깝다고”고 말하고 있다.

종남의 판사 생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는 판사 자리를 떠난 후 진주에서 변호사로 오랫동안 활동했는데 당시 행적 일부가 동아일보에 나타난다. 그가 울산 청년들을 위해 벌인 변론 중 1929년 울산군청년연맹 활동 관련 변론이 있는데 동아일보는 당시 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그동안 두 번이 연기되어 왔던 울산군청년연맹 사건의 강철·조형진·권우락 3인에 대한 치안유지법 및 보안법 위반에 대한 공판이 부산지방법정에서 열렸다. 방청석에는 각 피고들의 부모와 형제 친인척들로 빈틈이 없었다. 재판장은 장시간 심리가 있은 뒤 검사의 구형과 변호사의 무죄 변론을 들은 후 폐회하였는데 판결 언도는 5월4일 있을 예정이다.’

여기서 무죄 변론을 주장했던 변호사가 종남이다. 이 재판에서 강철은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2년 형을 받은 후 항소해 같은 해 11월 대구 복심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는데 이와 관련 동아일보는 11월25일 자 신문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그동안 많은 고생을 했던 조형진과 강철이 이번 16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19일 귀향했는데 당일 울산 병영지역에서는 각 단체와 동지들이 환영을 많이 나와 도시가 혼란을 겪었다.’

이외에도 언론에 나타난 종남의 변론 재판을 보면 1926년 8월3일 ‘기부강청사건’ 제1회 공판, 1928년 6월25일 경남도청년연맹 공판, 1929년 4월30일 방청금지 울산군청년연맹 공판 등이 있다.

종남은 법조인으로 일제강점기 울산 항일운동가편에서 이처럼 많은 변론을 했지만 오래 살지 못했다. 1936년 눈을 감았으니 49살까지 산 후 타계한 셈이다. 그것도 질병과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례식에서 너무 과로한 바람에 진주로 돌아가던 중 여관에서 절명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울산이 고향인 그가 당시 가까운 부산이 아닌 먼 진주에서 오랫동안 변호사로 활동한 것은 진주가 경남 도청소재지였기 때문이다.

종남의 문중 산소는 동구 남목 쇠평마을에 있다. 남목에서 주전으로 넘어가다 보면 울산테마식물수목원으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올라가다 보면 수목원 정문 조금 못 미쳐 오른편으로 난 오솔길이 있고 이 오솔길 중앙으로 산소가 크게 둘로 나누어져 있다.

오솔길 왼편에는 이규현 옹 부부 묘가 있고 이 묘 앞에 규현 옹의 장남 종림의 무덤과 비석이 있다. 종남 부부 산소는 오솔길 오른편에 비석과 함께 있는데 무덤에 상석이 있지만 글이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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