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김취려 장군 산소와 선양 사업

1172년 출생 1231년 강화도로 입성
몽골 침입에 맞서 싸워 큰 공 세우고
63세 나이로 타계해 강화도에 묻혀
후손이 고향인 언양 화장산에 이장

임진왜란때 비석 파손 등 우여곡절
지방 문화재로 지정 매년 향제 지내
언양김씨 중시조지만 선양사업 부족
울산시민들 위열공의 업적 잘 몰라
문화재 연구위한 의견으로 산소 점검
문중 중심으로 선양사업도 활기 띨듯

▲ 언양 화장산에 있는 위열공 김취려 장군의 봉분이 문화재 연구원들의 점검 과정에서 예고 없이 사라져 화장산을 찾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사진은 석등과 호석이 있던 옛 산소.
▲ 언양 화장산에 있는 위열공 김취려 장군의 봉분이 문화재 연구원들의 점검 과정에서 예고 없이 사라져 화장산을 찾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사진은 석등과 호석이 있던 옛 산소.

울산은 국난이 있을 때마다 많은 애국 열사들이 나와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섰다. 위열공 김취려 장군은 고려가 거란과 몽골 침입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장수로 지혜와 용맹을 발휘해 이 나라를 구했던 인물이다.

고려시대 문하시중 벼슬까지 했던 그는 울산 고을이 생긴 이래 최고 관직을 누렸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또 언양김씨 중시조로 그의 후손 중에는 울산을 빛낸 인물이 많다.

위열공은 1172년 언양에서 태어나 고려를 지키는 데 앞장서다가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고종이 강화도로 천도하자 왕과 함께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63세의 나이로 타계한 후 강화도에 묻혔다.

▲ 김취려 장군의 옛 산소에 지금은 봉분 없이 비석만 서 있다.
▲ 김취려 장군의 옛 산소에 지금은 봉분 없이 비석만 서 있다.

후손들은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화평해지자 위열공 산소를 그가 태어났던 언양 화장산으로 이장했다. 이후 후손들은 지금까지 화장산 능골 위열공 산소에서 향제를 올리고 있다.

그런데 최근 위열공 산소가 갑자기 사라져 화장산을 등산하는 사람들이 놀라곤 한다. 등산객들을 더욱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은 산소가 사라진 이유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없기 때문이다.

옛 산소 자리에는 봉분 대신 붉은 황토가 깔려 있고 황토 위에는 얼마 전까지도 산소 앞에 있었던 비석 두 개가 꽂아 놓은 듯이 서 있다.

조선 중종 25년(1530)에 발간된 <신동국여지승람>에는 위열공 산소와 관련 언양현의 송동(松洞)마을을 소개하면서 ‘현의 북쪽 2리에 있는데 김취려 장군이 어릴 때 놀았던 곳으로 장군이 손수 심은 소나무가 아직도 있다. 그러나 무덤이 동(洞)안에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알 길이 없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위열공 산소를 확인한 사람이 의병장 김천일 장군이었다. 위열공 14세손인 김 장군은 경상도 도사(오늘날 감사직)가 된 후 임진왜란 직전인 1577년 위열공 산소를 확인하기 위해 언양에 왔다. 당시만 해도 위열공 무덤은 비석도 상석도 없어 확인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김천일 장군은 당시 언양향교에서 유림을 만나 구전으로 전해오는 위열공 산소가 화장산 능골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유림의 안내로 그가 위열공 산소를 찾았을 때 일반 산소에 비해 봉분이 컸다. 위열공 산소가 있던 골짜기를 ‘능골’로 부르는 이유도 밝혀졌다. 위열공은 문하시중으로 당대 최고의 벼슬을 누렸지만, 왕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산소 역시 능의 형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위열공이 돌아갔을 때 고종이 신하에게 그의 장례식을 왕의 예를 갖추어서 하라고 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가 묻힌 골짜기 이름이 능골로 불려 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때 그는 위열공 산소의 봉분을 새로 꾸미고 석물도 갖추어 예를 표시했다.

그리고 당시 상주 목사였던 백곡(栢谷) 정곤수(鄭昆壽)에게 비문을 당부했다. 백곡이 쓴 비문에는 위열공 행적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고종을 섬길 때 요(療) 나라 잔당들이 국내로 침입하고 몽골병이 국경을 압박하니 안전과 위태의 시기가 털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급박한 상황이었는데도 왼쪽으로 끌고 오른쪽으로 이끌며, 먼 나라와 우호를 맺고 가까운 적은 공격하고 외교적인 연회 석상에서 담판해 상대를 승복시켰다. 적을 물리침이 신과 같아 싸움에 임하여 적을 제압할 땐 특이한 꾀를 많이 내어 큰 공을 이루나 스스로 자랑한 적이 없었다. 추밀원사와 참지정사가 되고 중서시랑평장서에 임명되었다. 고종 21년(1234) 오 월 기미 일에 문하시중으로 서거했고 뒤에 고종묘(高宗廟)에 배향되었다. 공은 평생을 절약 검소 정직했고 충의를 지켰다. 군대를 엄정하게 통솔해 사졸들이 따랐고 맛있는 음식을 갈라먹고 적은 것도 나누어 먹어 적을 만나면 졸병들이 사력을 다해 싸웠다. 그가 적군과 대적할 때는 창과 화살이 난무해 온몸이 상처가 나도 충성스러운 의기가 오히려 전신에 넘쳤고 강을 건너다 배가 난파되어 키와 노가 부서져도 얼굴빛에 변함이 없었다. 중병에 걸려 부하들이 치료를 받으라고 해도 ‘차라리 변방에서 죽을지언정 어떻게 집에서 편안히 쉬겠느냐’면서 거절했다.”

불행히도 이 비석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파손되었다. 왜병이 이 비석을 파손한 것은 김천일 장군이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에서 김시민과 함께 끝까지 항쟁하다가 순직한 것을 알고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중 언양에 김 장군이 위열공을 위해 세운 비석이 있다는 것을 알고 파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열공 비석은 1670년 후손들에 의해 다시 세워졌고 이후 40여 년이 지난 후 다시 후손 김치룡이 경주 부사로 온 후 비문을 개각했다. 이 비석은 해방 후에도 산소에 있었다.

위열공 산소에는 비석만 있던 것이 아니고 김천일이 능골 무덤이 위열공 산소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이 산소의 향제를 언양향교 유림이 맡아 후손들과 함께 올렸다. 이런 향제는 불과 60~70년 전까지도 지속되었다.

해방 후에는 한 때 산소와 관련된 논란도 있었다. 조선 조 말 강화도에서 도로 공사를 하던 중 위열공 행적이 새겨진 지석이 발견되는 바람에 언양 산소가 위열공의 진묘가 맞는지에 대한 진실 공방이 문중에서 일어났다. 강화도 지석은 1909년 발견되었다.

이 비석은 발견 후 곧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오랫동안 있다가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와 지금은 서울 규장각에 있다. 지석이 강화도에서 발견되자 강화도에 살고 있던 후손들이 강화도 산소가 위열공의 진묘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논쟁이 되었다.

울산 문중으로는 450여 년 전 이미 김천일 조상이 확증해 놓은 언양 산소가 진묘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때 언양 산소가 위열공 진묘라는 것을 다시 확인한 인물이 당시 동구 남목에 살고 있던 위열공의 22세손 김경환(金敬煥) 어른이었다.

김씨는 그때 언양 향교를 찾아가 향교 유림 43명으로부터 능골 산소가 진묘임을 확인하는 약조를 얻어내었는데 이 문서를 지금도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다. 이 무렵 언양 면장이 마침 위열공 후손인 김진봉이었기 때문에 김 면장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김씨는 11대 언양 면장으로 1952년 5월부터 1959년 8월까지 면장을 지냈는데 울산대학교 김성득 전 교수가 김 면장 이들이다.

이후 문중은 협의를 통해 언양과 강화도 산소 둘 다 위열공 산소로 정했다. 이후 두 무덤은 모두 지방 문화재가 되었다. 그리고 매년 후손들이 향제를 지내고 있다.

이처럼 조상들이 힘들게 지켜온 언양 산소를 2019년 울산 문화재연구원들이 점검했다.

그런데 산소를 점검하던 문화재연구원들이 산소 내 중앙에 있어야 할 내용물 일부가 앞으로 밀려 나와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산소에 대한 세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어놓았다.

문화재연구원들은 또 그동안 후손들이 봉분 석물을 임의로 배치하는 바람에 산소가 고려 시대 형이 아닌 상태라면서 이에 대한 손질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위열공 산소는 해방 후 후손들이 호석과 장대석을 임의로 붙이는 바람에 흡사 임금의 능처럼 보였다.

이렇게 해 다시 산소를 들여다보게 된 것이 올해 8월이었다. 이때는 11월까지 조사를 끝내고 봉분을 다시 만들 계획이었다. 일을 급하게 하다 보니 봉분을 개봉할 때 불도저를 동원해 이를 보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최근 들어 문중 내 문제도 불거졌다. 얼마 전 울산지역 일간지에는 문중 여성을 홀대하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 기사를 보면 국내 대부분의 문중이 문회를 비롯한 각종 문중 행사에 문중 여성들을 참여시키고 있는데 언양김씨 문중에서는 아직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문중 어른들은 “여성의 경우 일단 출가하면 친정보다는 시가 행사에 더 충실할 수 있도록 아직 문중 일에 여성 참여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는 아쉬운 변명을 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 중론인 것 같다.

더 큰 일은 위열공 선양 사업이다. 울산 사람들 중 위열공이 울산 출신 인물임은 물론이고 그의 산소가 언양에 있다는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울산에는 위열공 후손으로 지금은 고인이 된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을 비롯해 대구 사범 박정희 대통령과 동기인 김병희 물리학자가 있다. 그리고 김철 전 울산상공회의소 회장, 김철욱 전 울산시의회 의장 그리고 김병수 전 동구의회 의장이 모두 언양김씨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학성이씨 후손들이 울산은 물론이고 전국 곳곳에 충숙공 이예를 추모하는 각종 기념사업을 벌이고 서원을 세우고 최근에는 이예로 준공식까지 가졌다. 나라 사랑과 업적이 충숙공 못지않은 위열공이 이처럼 울산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후손들의 선양 사업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에 대해 언양김씨 문중은 “조상 선양사업을 후손이 한다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일 수 있어 일을 미루다 보니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 면서 “앞으로 화장산 인근에 위열공 추모실을 지어 위열공 선양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번 산소 점검을 기화로 위열공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얼마나 훌륭한 일을 했나 하는 것을 울산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그를 선양하는 사업이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