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풍경과 삶 - (8·끝) 반구대(盤龜臺)

조선시대 언양현의 대표적 경승
겸재 정선도 그림으로 절경 남겨
귀양왔던 정몽주 기린 반고서원
조선시대 울산 성리학의 발생지
시인 묵객 소통의 장이었던 집청정
지역 한시문학의 부흥 이끌었던 곳

▲ 반구대소견(盤龜臺所見)(102x55㎝, 한지에 수묵담채, 2022)

반구대는 대곡리 반구산 끝자락에 있는 바위 언덕으로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다. 반구대는 반구산 줄기가 대곡천 물가와 만나는 끝부분에 있다. 조선시대 언양현의 대표적인 경승을 북구남작(北龜南酌)이라 하였는데, 북쪽은 반구대, 남쪽은 작괘천을 두고 한 말이다. 반구대는 포은 정몽주의 자취가 남아있다 해서 포은대(圃隱臺)라 한다.

반구대는 포은 이전에 신라시대 원효와 관련있다. 원효의 반고사가 반구대에 있었다는 기록은 <삼국유사> 낭지승운 조에 나온다. 원효는 반고사에서 ‘초장관문’과 ‘안신사심론’ 등을 저술하고 나서, “서쪽 골짜기의 중(원효)은 머리를 조아리고/ 가는 티끌을 불어 영축산에 보내고/ 가는 물방울을 날려 용연에 던집니다”라는 시구와 함께 이 책을 영축산에 거처하던 은사 낭지에게 바쳤다. 시구에 나오는 서쪽 골짜기는 반구대이며, 영축산은 울산 문수산, 용연은 태화강을 말한다. 절터에는 불상과 탑재가 있었는데 1965년 부산대학교박물관으로 옮겨갔다.

1712년(숙종 38) 반고사 절터에 반고서원이 창건됐는데, 지금의 반고서원 유허비에는 서원의 내력을 자세히 밝혀 놓았다. 일반적으로 유허비란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석이다. 반고서원 유허비는 고려 말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1337~1392)의 학덕을 기렸다. 포은은 1375년(우왕 1) 성균관 대서성의 벼슬에 있으면서 중국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려는 정책에 반대하다가 언양으로 1년 넘게 귀양살이를 했다. 언양에 머무르는 동안 반구대에 올라 ‘중양절 감회’라는 시를 짓는 등 자취를 남겼다.

조선시대에 지역 유생들이 그를 추모하여 반구대를 ‘포은대’라 명명하고, 반고서원을 세웠다. 반고서원에는 포은 정몽주와 회재(晦齋) 이언적, 한강(寒岡) 정구 등 세 명을 추앙하여 제사했다. 반고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문을 닫았다. 그 후 지역 유림들이 포은대영모비(1885) 포은대실록비(1890), 반고서원유허비(1901) 3기의 비석을 차례로 세웠다.

현재의 반구서원은 사연댐 건설로 건너편인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매년 반구서원에서는 음력 3월에 삼현제를 올리고 있다. 반구대 인근에 위치하는 모은정은 청안 이씨 문중의 정자이다. 포은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1920년 정혁과 그 형제들이 선대의 뜻을 계승해 지었다.

반구대에서 중요한 건축물은 집청정이다. 집청정(集淸亭)은 1713년(숙종 39) 병조판서를 지낸 운암(雲巖) 최신기(1673~1737)가 건립한 정자로 반구정이라 불렸다. 집청정은 맑음을 모은다는 뜻이며, 오른쪽에 청류헌(물 흐르는 소리를 듣다), 왼쪽에 대치루(반구대와 서로 마주함)가 있다. 정자의 모습은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謙齋) 정선(1676~1759)의 ‘반구’와 겸재 또는 그의 손자로 추정되는 정황의 작품인 ‘언양반구대’에도 묘사되어 있다. 첨언하면 ‘반구’ 그림은 겸재가 70세 그린 그림으로 조선시대 문인이자 여행가로 유명한 옥소(玉所) 권섭(1671~1759)이 남긴 화첩 <공회첩>(孔懷帖)에 들어있다. 권섭은 반구대의 절경을 보고, 겸재에게 그림을 부탁하였고, 겸재가 그려준 그림과 편지, 발문 등을 엮어 <공회첩>을 만들었다. 여기에 포함된 그림이 반구대를 그린 ‘반구’와 ‘옹천’의 두 점이다. ‘언양반구대’는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교남화첩>(嶠南畵帖)에 있다.

울산 한시문학의 부흥을 일으킨 집청정은 반구대를 찾는 시인 묵객의 소통의 장이 되었으며, 조선 후기부터 구한말까지 284명의 시인이 이곳에서 4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이 작품들을 운암의 후손인 최준식이 정리하여 한 권의 책(집청정 시집)으로 묶었다. 시집에는 문신, 학자, 경상도관찰사, 인근 지역 수령들이 이름을 올렸다.

숙종 때 문신인 식산(息山) 이만부(1644~1732)는 그의 문집 <식산집> <지행록> ‘반구기’에, “옥천선동, 완화계라는 글자를 돌에 새기고, 또 학을 그려 넣었는데, 이것은 모두 최 군이 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최 군은 당시 집청정 주인 최신기였고, 새겨진 곳은 반구대 개울가 암벽이다.

이곳에는 학 그림과 더불어 재야 선비들의 이름도 바위에 새겨져 있다. 조선말기 언양 사림인 천사(泉史) 송찬규(1838~1910)의 ‘반계구곡음’ 무대는 반구대 인근 대곡천이다. 그의 시 ‘반계구곡음’ 중 4곡 결구에, “옥정선원은 반구대의 완연한 지표이네(玉井仙源宛指南)”라고 하여 반구대가 빼어난 풍광의 표준이라 읊었다.

이처럼 반구대는 원효의 반고사가 있던 불교 유적지며, 포은 정몽주를 추앙하여 태동된, 울산 성리학의 발생지다. 더하여 반구대 절경이 겸재 정선의 화폭 속에 남겨지고, 여러 문인 재사들의 한시로 제작되면서 반구대는 조선시대 울산 한시문학과 예술의 탄생지가 되었다.

그림=최종국 한국화가·글=문영 시인

※QR코드를 찍으면 간단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김은정 인턴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