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한달, 상실감 아직 치유 안돼
원인은 무사안일주의식 아마추어리즘
정쟁 그만두고 모두가 무한책임 져야

▲ 정연우 UNIST 디자인학과 교수

10월의 마지막 주말 믿을 수 없는 참사가 일어났던 이태원. 어느덧 한 달이 되어간다. 그러나 감당하기 힘든 상실감은 아직 아물지 못했다. ‘제발 이번만은…’이라고 기도했던 바람도 아랑곳없이, 진즉에 정쟁의 도구가 되어버린 참사는 이제 그 끝을 모른다. 이 글은 특정 정권, 정치세력을 비난 또는 옹호하는 내용이 아님을 미리 밝힌다.

희생자 명단을 공개하네 마네, 근조 리본을 뒤집어 패용케 한 이유가 어떠하네, 놀러간 사람들이 잘못 했네 아니네, 지난 정권에서는 인파를 관리 했네 안 했네, 책임의 범위와 처벌 대상은 어디까지, 누구까지 인가…. 생각해보면, 이 많은 논란 중에 과연 상처받은 자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한 쪽은 정권의 실정을 부각하는 도구로 활용하기에, 한 쪽은 방어와 발뺌에 여념 없을 뿐이다. 혹자는 양비론, 혹자는 시스템 문제라 지적하지만, 나는 그 편한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참사의 원인은 ‘아마추어리즘’에 있다. 직무에 임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수준이다.

사회 구성원은 일을 하고 대가를 얻는다. 이는 대통령부터 말단 공무원, 대기업 회장부터 자영업자, 정규직부터 비정규직, 최저시급 아르바이트까지 똑같다. 즉 직업인이다. 직업인을 영어로 Professional(프로페셔널)이다. 그 ‘프로페셔널’의 반대가 아마추어다. 축구, 야구같은 스포츠에서나, 직장인과 학생을 구분하는 데서나 잣대는 능력, 즉 직업성이다. 일이 좋든 싫든, 급여가 많든 적든, 직급이 높든 낮든, 스스로 택한 직업인, 프로페셔널은 직무에 따라 당연히 그 책임이 따른다. 그런데 가성비라는 덕목 탓일까. 일과 책임의 최소화를 추구하는 무사안일주의가 최고인 양 여기는 우리나라의 세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엇이든 가능한 회피하려는 관성이 유난히 크다.

이번 참사에서도 직무연관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국가 대한민국이다. 당연히 구성원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존재 이유인 복수의 정부기관과 조직은 하위 규정의 존재 여부를 탓하고, 미비점을 들어 서로 책임을 전가하기 바쁘다. 세월호 참사 때, 선장과 유병언처럼 국민적 분노를 쏟아낼 총알받이를 찾는 것인가. 안된다. 마녀사냥으로 슬그머니 취하는 면죄부는 또 다른 참사를 반복할 뿐이다.

아웃사이트, 세계 외신의 눈들은 하나같이 국가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규정이 있으면 정부의 잘못이고,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는 시각은 정상국가(Normal Country)의 아웃사이트에 존재하지 않는다. 프로페셔널하기 때문이다.

규정 미비의 책임 또한 규정을 만드는 관리주체의 몫임이 자명하니까. 언제는 통제가 되었고 이번에는 통제가 안 됐다는 정권별 구분도 의미 없다. 입법, 사법, 행정부를 통틀어 대한민국이라는 관리주체가 정권 따라 180도 변하는 것이 아님은 우리 스스로 더 잘 안다. 언제까지 아마추어같이 일 할 것인가? 사고가 터질 때마다, 규정 찾아 조사하고, 어긴 사람을 일벌백계처럼 처벌하며 할 일 했다 생각하는 관리자는 스스로의 안녕만 챙기는 아마추어다.

아니 세상에, 올해 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정의를 외치며 위험을 스스로 자처하며 참전하는 국민들조차 보호한다며 처벌하는 대한민국 아니었던가? 그럴진대 10월의 주말 밤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참사의 책임에 논란이라니. 범위의 크고 작음은 상관없다. ‘관리자-Controller’ 역할이 직무에 들어 있는 모든 이들은 대통령이 언급한 ‘무한책임’이라는 세상 멋진 단어의 뜻을 생각해보면 좋겠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그래도 아마추어 국가는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길에서 한번쯤 마주치고, 어쩌면 나와 함께 춤추고 노래 부르며, 어쩌면 세상을 구하는 주인공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 뒤로 잠든 우리들의 영혼을 위로하며.

정연우 UNIST 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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