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산업화 이전까지만 해도
울산엔 영남 대표 유림·문중 많아
임란때 의병 배출하고 사학 세워
손후익·이재락, 항일운동 전개도
온산면장 고기철·재력가 심우빈 등
해방 후 역대 전교 남긴 일화 다수
최근 새로운 전교로 엄주환 추대
후손이 애국활동 기억할 수 있도록
임기내 파리장서 기념탑 건립키로

▲ 울산향교 전경

울산은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울산만의 생활 문화를 갖고 있는데 그 중심에 울산향교가 있다. 울산의 전통문화를 지키고 교육하는 일을 향교가 했다.

그런데 오랜 시간 우리 민족이 효를 숭상하고 충을 섬기고 예로서 사회 질서를 지킬 수 있도록 지도해왔던 향교가 지금은 우리의 생활방식과는 먼 거리에 있다.

지난주 울산 향교 유림이 향후 3년간 향교를 이끌어 갈 새 전교를 선출했다. 이번 전교 선출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예년과 달리 유림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추대한 것이고 둘째로 울산 향안문중이 아닌 영월엄씨 엄주환씨가 선출된 것이다.

역대 전교 선거에서 영월엄씨가 선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엄 새 전교는 조선 세조 때 단종이 영월에서 눈을 감았을 때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안치했던 엄흥도 후손이다.

울산에 엄흥도 후손의 집단 거주지는 울산 울주군 온산읍 화산리 산성마을에 있다. 또 삼동면 둔기마을에는 엄흥도를 모시는 원강서원이 있다. 엄창섭 전 울주군수와 경상일보 엄주호 사장이 엄흥도 후손이다.

▲ 울산의 전통문화를 지키고 교육해왔던 울산향교 전경과 이번에 새로 추대된 엄주환 전교가 파리장서 기념탑 건립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 울산의 전통문화를 지키고 교육해왔던 울산향교 전경과 이번에 새로 추대된 엄주환 전교가 파리장서 기념탑 건립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울산은 1960년대 후 산업도시가 되면서 유학 분위기가 점차 사라졌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울산에는 영남을 대표하는 유림과 문중이 많았다.

문암 손후익과 강석 이재락은 영남을 대표하는 유학자다. 이들 둘은 모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항일운동을 펼쳤던 심산 김창숙과 사돈을 맺었을 정도로 학문이 높았다. 문암과 강석은 일제강점기 심산과 함께 만주에 신흥무관학교 건립을 위한 군자금 모금에 앞장섰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문암은 특히 문장이 뛰어나 울산의 재실과 정자 등에는 그의 글이 많아 남아 있다. 강석은 당대의 거부로 많은 재산을 독립운동에 희사했고 해방 전후 전국 유림을 상대로 시회도 여러 차례 열어 당시 수작들이 지금도 학성이씨 서원인 재천정에 걸려 있다.

울산은 안동과 진주만큼 유교 문화가 뿌리 깊지는 못했지만, 유림들이 오랫동안 울산 사회를 이끌어 왔다

해방 후 심산을 중심으로 유림 대표들이 성균관대학을 건립할 때는 울산 유림이 대거 참여해 많은 기금을 내기도 했다.

울산에는 해방 후에도 소위 양반으로 불리는 뿌리 깊은 성씨들이 많았다. 박윤웅을 시조로 모시는 울산박씨, 이예를 시조로 모시는 학성이씨, 임란 때 공신을 배출한 광주안씨, 파평윤씨, 김해배씨, 제주고씨, 아산장씨, 밀양박씨, 고령김씨, 평해황씨가 이들로 이들 씨족은 대대로 향촌을 이끌어왔고 임란이 일어났을 때는 의병을 배출했다.

또 임란 후에는 울산향교를 반구동에서 교동으로 옮기고 조선시대말 부패한 관학을 대신해 사학을 세우는데도 이들 씨족이 앞장섰다.

울산향교는 그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향교는 조선 시대 공식적인 지방 교육기관으로 고을마다 설립되었다. 향교는 크게 교육하고 향제를 올리는 두 가지 역할을 한다. 향교는 매년 춘추기 석전대제를 봉행한다. 또 예전처럼 공자를 받드는 교육을 하지는 않지만, 요즘도 충효교실과 평생학습원을 운영하고 한시백일장을 개최하는 등 예의범절을 중점적으로 가르친다.

울산향교는 창건 당시 신학성 북쪽인 반구동 구교 마을에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현 중구 명륜로에 다시 건립되었는데 이때가 효종 3년(1652)이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울산에는 또 다른 향교가 언양읍에 있어 한 고을에 두 개의 향교가 있는 셈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향교가 고을마다 설립될 때 언양의 행정구역이 울산과 달라 언양에도 향교가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울산향교와 언양향교의 관할 구역을 보면 특이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언양향교는 행정적으로 울주군에 속하지만 울주군 전체 읍면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언양·두동·두서 등 서부 5개 읍면만 관할하고 이외 지역은 울산향교에 속해 있다.

이번에 선임된 엄 새 전교는 해방 후 제26대 전교가 된다. 해방 후 역대 전교를 보면 고기철·고기업·이수대·신우빈 등 눈에 익은 인물이 많다.

이중 이수대는 3대부터 5대까지 무려 3대에 걸쳐 전교를 지냈다. 서예가로 신정동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던 이 전교는 재산가로 초기 전교가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재정적 도움을 많이 주었다.

6대 고기업은 제주고씨로 전교가 된 후 읍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바람에 3년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그는 읍의원이 된 후 읍의장과 읍장을 역임했다.

고씨 중 눈길을 끄는 또 다른 전교가 있는데 그가 고기철이다.

고씨는 고기업의 형으로 일제강점기 온산 면장으로 있는 동안 일화를 많이 남겼다. 울산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울산을 대표했던 면장으로 온양면의 최봉식 그리고 하상면 유창식과 함께 온산면장을 지냈던 고씨를 꼽는다.

이들은 모두 배짱이 좋아 일제강점기 면장을 지내면서도 일제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면민들의 보호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최 면장은 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고 일본에서 공부했던 유 면장은 머리가 뛰어나 해방 후 정해영 국회부의장 선거 브레인 역할을 했다.

온산면장을 무려 12년이나 지냈던 고씨는 배짱이 좋아 당시 온산면에 있었던 일인들까지도 그의 지시를 거절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온산에는 어항이 발달해 이곳에서 일하는 일인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들이 일할 때 고씨가 나타나면 모두 깍듯이 절했다고 한다. 고씨는 배짱이 얼마나 좋았던지 부산으로 나들이를 갈 때면 온산역에서 기차를 타지 않고 자기 집 앞에서 기차를 탔다고 한다. 그는 달리는 열차 앞에서 “내가 온산 면장 고기철이다 기차를 멈추어라”고 고함을 친 후 열차가 서면 온산 면 직원이 놓아주는 발판을 밟고 기차에 올랐다고 한다.

재산도 많았던 그는 2대 총선에도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해방 후 성남동에서 유명한 신천지 정종 공장을 운영했던 고극일 사장이 그의 아들이다.

심우빈 전교를 추대할 때는 어려움이 컸다.

심씨가 전교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해방 후 전교가 되었던 대부분 인물이 유림으로 오랫동안 향교를 드나들면서 각종 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울산에서 농협장을 지내는 등 재력가였던 심씨는 향교가 되기 전까지 전혀 향교 일을 하지 않아 전교가 되는 데는 하자가 많았다. 그러나 당시 향교가 재정적으로 힘들어 유림이 이를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을 찾다가 추대했던 인물이 심씨였다.

심씨가 전교가 된다는 소문이 나자 이를 반대하는 유림이 곳곳에서 나타났는데 이중 대표적인 인물이 송정박씨 용진 어른이었다. 용진 어른은 안동의 병산서원과 도산서원 원장을 지냈던 인물로 영남을 대표하는 유림이었다.

전교 추대를 앞두고 울산 유림이 박 어른을 찾아가 향교의 재정 형편을 얘기한 후 심씨를 전교로 추대키로 했다는 의견을 내어놓자 박 어른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돌아앉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그는 유림이 찾아갈 때마다 고개를 돌리다가 나중에야 하는 수 없이 수락했다고 한다.

이처럼 어려운 가운데 전교가 되었던 심씨는 유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임기 중 향교 재정을 튼튼히 했을 뿐 아니라 그가 물러난 뒤에도 향교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1970~1980년대가 되면 향교는 급변하는 우리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또 다른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당시 우리 사회는 산업사회로 능률을 강조하다 보니 질서를 중시하는 유교와 간극이 생겼다. 이를 반영하듯 당시 출간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자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고종용(高鍾鎔) 전교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우리나라가 당시로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해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이 적지 않아 요즘 와서는 차라리 질서를 중시하는 공자의 가르침이 더 중시되고 있다”면서 “지금은 많은 사람이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엄주환 새 전교는 자신의 임기 동안 파리장서 기념탑을 세울 것을 약속했다. “3·1운동 후 파리장서 회의가 열렸을 때 울산유림 중 이규린과 이우락 어른이 이에 참여해 심산이 벌인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데 앞장서다가 옥고를 치렀다는 것은 울산 유림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귀중한 사건입니다. 이런 애국 활동은 우리만 알 것이 아니라 앞으로 후손들도 기억할 수 있도록 선양 기념탑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국에서 파리장서에 참여한 유림이 있었던 고을에서는 그동안 대부분 그들을 선양하는 기념탑을 세웠다.

오랫동안 전국을 돌면서 다른 지역 기념탑을 보았다는 엄 새 전교는 이 중에서도 봉화 기념탑이 가장 인상적이었다면서 자신이 전교에 취임하면 유림과 협의 해 이 사업을 서두를 계획이라고 밝혔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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