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8월부터 2년간 울주군수 지내
변동주 이장 설득으로 방기마을 지원
일부 주민 반대 등 우여곡절 겪은 후
간이상수원 확보 공사 1972년 마무리
80여가구 물걱정 않고 살 수 있게돼
집수정 건립때 박군수 보은비도 세워

변이장은 이후 정식 공무원으로 승격
삼남면장 재임하며 ‘삼남지’ 발간
삼남면 기본현황·역사·행정 등 정리
2015년 교육·문화부문 군민상 수상

▲ 울산 울주군 삼남읍 방기마을에 있는 박용범 군수의 선정비석.

1970년대 울산에서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많은 공무원이 새마을 사업을 펼쳤지만, 이 중에서도 울주군민이 잊지 못하는 인물은 당시 울주군수를 지냈던 박용범씨다.

박 군수는 울주군 제22대 군수로 1971년 8월부터 1973년 6월까지 근무했다.

그는 울주군수로 2년 남짓 근무했지만, 군수로 있는 동안 새마을 운동을 열심히 펼쳐 군 공무원들 사이에 ‘새마을 군수’로 불리기도 했다.

그가 펼친 새마을 사업 중 특히 삼남읍 방기마을 주민들을 위해 펼친 상수도 사업은 그때까지 물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주민에게 큰 도움을 주어 지금까지도 방기마을 주민들은 박 군수를 잊지 못하고 있다.

박 군수가 방기마을에 상수도 사업을 펼칠 때까지만 해도 방기 마을 주민은 식수가 부족해 고통을 겪었다.

당시 방기마을에는 상방과 중방, 하방과 연동 등 4개 자연마을이 있었는데 이들 마을에는 우물이 하나씩 있었다. 그러나 우물의 수량(水量)이 부족해 식수 확보가 힘들었다. 또 우물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주민은 물을 머리에 이고 20~30분이 넘는 거리를 오가야 했다. 그나마 빨래라도 하려면 물이 없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하천까지 가 빨래를 해야 했다.

주민들이 이처럼 물 부족으로 식수와 생활용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간이상수도를 설치해야겠다는 생각했던 인물이 당시 이 마을 변동주 이장이었고 변 이장이 이 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행정적으로 적극 지원해준 사람이 박용범 군수였다.

변 이장은 20대 초반 이장이 되었는데 그가 약관의 나이에 이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부산까지 가 공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하북초등학교와 보광중학교를 졸업했던 변 이장은 고등학교는 부산으로 가 낮에는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야간학교를 다녀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가 낮에 일한 곳이 변호사 사무실이었다.

▲ 집수정.(비석은 현재 집수정 앞에 쓰러진 채로 있다.)
▲ 집수정.(비석은 현재 집수정 앞에 쓰러진 채로 있다.)

당시 그는 방을 얻을 형편이 못 되어 낮에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사무실에 있는 의자를 모아 간이침대를 만들어 의자 위에서 잤다. 이러다 보니 고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몸이 많이 상해 방기마을로 돌아와 쉬면서 간간이 마을 일을 돕고 있었다.

방기마을 사람들이 그를 마을 이장으로 추대했던 때가 그의 나이 24살 때였다. 그가 마을 식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간이상수도 사업을 생각한 것은 당시 범서읍 천상리에서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상수도 사업을 펼쳐 마을 사람들이 물 걱정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울주군에는 300여 개의 리(里)가 있었는데 이중 상수도 사업을 벌였던 마을은 천상리 한 마을뿐이었다.

상수도 사업을 펼칠 때 가장 힘들었던 일이 첫째가 원수를 확보할 수 있는 저수장이 있어야 했고 두 번째는 사업에 소요되는 예산 확보였다. 방기마을의 경우 다행히 원수 확보는 영축산 중간에 맑은 물이 많이 솟아나는 참샘골이 있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예산 확보는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할 길이 없었다.

이런 고민을 하던 차 변 이장이 찾은 사람이 박 군수였다. 변 이장은 박 군수를 찾아가 자신의 간이상수도 사업 계획을 밝히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변 이장의 설명을 들은 박 군수는 울주군에는 물 부족으로 고생하는 마을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면서 방기리 마을만 특별히 예산지원을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박 군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지 않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군청으로 박 군수를 찾아가 사업비 지원을 요청했다.

실제로 당시 군청은 현 동헌 자리에 있어 방기마을에서 이곳까지 가려면 거리상 멀었을 뿐 아니라 교통이 좋지 않아 버스를 타고 동헌까지 가 군수를 만나고 오는데 만 하루가 걸렸다. 그러나 그는 이런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하루가 멀다고 박 군수를 찾았다. 이런 변 이장의 고집에 지고 만 박 군수는 어느 날 자신이 직접 원수가 있는 영축산을 둘러보고 예산지원 문제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 박 군수와 변 이장이 영축산을 찾은 때가 그가 간이상수도 사업 계획을 갖고 처음으로 군청을 찾은 6개월 후였다.

상수원은 영축산 중턱 서나무골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곳에는 땅에서 물이 많이 솟아나 방기 마을 사람들은 샘 아래 간이 저수지를 만들어 놓고 이 물을 농사를 짓는 데 썼다. 이를 본 박 군수는 만족을 표시하면서 군에서 상수도 사업에 필요한 자재와 경비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일은 순조롭지 못했다. 무엇보다 방기마을 일부 주민이 참샘골 물을 식수로 쓰면 농사짓는 물이 모자란다고 간이상수도 사업을 반대했다. 이 때문에 변 이장은 이들을 설득하느라고 큰 고생을 했다.

경비도 군 지원금으로만 모자라 마을 주민이 적지 않은 공사비를 내어야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공사가 1972년 완공되어 방기마을 80여 호가 이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방기 마을 주민은 이처럼 박 군수와 변 이장이 힘써 만들었던 간이상수원 확보 공사가 1990년 후반기가 되면 수도관이 노후되는 바람에 1997년에는 다시 수도관을 교체해 요즘도 사용하고 있다.

변 이장은 이 사업 후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군청에 퍼지면서 1970년대 중반에는 기능직으로 군청에 들어가 일하다가 3년 후에는 정식 공무원이 되었다.

공무원 재임 중 그가 한 가장 괄목할 만한 일이 <삼남지> 발간이었다. 1997년 고향인 삼남면 면장이 되었던 그는 울산시 재정지원과 지역 업체의 후원금을 받아 무려 1000여 쪽에 이르는 <삼남지>를 1998년 발간했다. 이 책을 발간하는 데는 자료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박성조·권상술·신동익 등 지역민의 도움도 컸는데 이들은 모두 고인이 되었다.

이 책이 발간될 때만 해도 비용이 많이 들고 자료수집이 힘들어 울산시 산하 행정기관 중 이런 책을 낸 기관이 없었다.

책 내용 중에는 삼남면의 기본현황과 함께 역사·행정·문화·교육·종교·산업경제·교통과 통신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새마을 운동과 선거까지 모두 들어 있다. 더욱이 부록에는 울산시와 울주군 행정과 다른 읍면 기본현황까지 실어 놓아 울산시 행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의 발간은 다른 행정기관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선 이 책 내용 중에는 울주군의 교육이 들어 있는데 당시 집필자가 울주군 교육편을 쓰기 위해 울산교육을 알아보려고 했으나 울산교육사가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변 면장과 집필자가 당시 김지웅 울산교육감을 찾아가 울산교육사 편찬을 종용한 결과 2007년에는 울산교육청이 울산교육사를 발간했다.

변 면장이 2015년 교육·문화부문 울주군민상을 받을 수 있었던 이면에는 <삼남지> 편찬의 공로가 큰 작용을 했다.

변 면장이 2000년 울주군 공보실장으로 갔을 때는 그의 업적을 높이 산 당시 박진구 울주군수가 변 실장에게 <울주군지> 및 울주군 산하 14개 읍면지를 발간할 것을 지시했다. 따라서 2002년에는 <울주군지> 및 14개 읍면지가 그의 주도하에 발간되었다.

변 면장이 이장이었을 때 마을 상수도 사업을 펼 수 있었던 것은 박 군수의 용기도 있었다. 울산군은 일제강점기 건립한 군청 건물이 노후해 해방 후에는 이에 대한 개축이 필요했다. 그러나 군청에는 옛날부터 군수가 군청 건물을 손대면 좌천 당하거나 신변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미신이 있었다.

그런데 박 군수는 이런 미신을 믿지 않고 군수 재임 동안 군청 건물 개축을 벌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무렵 박 군수는 큰 자동차 사고로 시계탑 로터리 인근에 있던 김 외과에 한동안 입원해 치료 받기도 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그러나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는 2대 창원시장으로 영전되어 울주군청의 징크스가 미신이라는 것이 판명된 셈이다. 한편 변 면장은 울산시종합건설본부와 회계과·총무과를 거쳐 2007년 은퇴 후 지금은 언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초계 변씨대종회’ 회장을 맡아 문중 일을 보고 있다.

1971년 당시 상수도 사업을 하면서 만들었던 집수정은 지금도 옛날 그 자리에 있다.

방기마을은 그동안 도시인이 많이 모여들면서 아파트가 사방에 들어서 주민들이 많이 늘어났다. 그러나 마을 사람 중에는 수돗물보다는 오히려 산에서 가져오는 물이 수질이 좋고 값이 싸다면서 마시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집수정은 건립 후 여러 번 손질했지만, 외형은 옛 모습 그대로다. 집수정을 건립할 때는 집수정 바로 앞에 박 군수 보은비를 세웠다. 그런데 집수정은 그대로 있지만 비석은 쓰러져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다.

비석은 앞면이 땅에 붙어 뒷면만 드러나 있다. 비석에는 오른편에는 ‘芳基里洞民一同建立’(방기리동민일동건립)의 글이 새겨져 있고 왼편에는 ‘西紀 一九七二年 三月 三十日’(서기 일구칠이년 삼월 삼십일)이라고 비를 새긴 날짜만 새겨 놓았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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