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랄까, 상대가 되지 않는 나약한 적을 만난 느낌이랄까.
푸석하지만 단정하게 단발로 자른, 유난히 새카만 생머리.
햇빛을 환하게 받으면 새하얀 얼굴이 갓 마흔을 넘긴 듯도 했다.

카모마일처럼 메마른 꽃, 뜨거운 물에 담그면 향기를 풍기지만
이내 스러지고 마는. 행복은, 매일 버려지는 음식쓰레기처럼
악취를 풍기며 나를 찾아내라고 압박했다.

▲ 표제·일러스트 = 조혜정
▲ 표제·일러스트 = 조혜정

벌써 여름이 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오전인데도 볕이 뜨거웠다. 나는 카페에 앉아서 유리창 밖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 잎사귀와 들풀, 햇빛이 한데 어룽지며 뒤섞였다. 때 이른 열기와 오월의 서늘한 바람이 어우러져 흔들렸다. 그곳은 초록으로 소용돌이치는 출구 같았다. 움직이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고여 있는 건 질색이었다. 흔들리고, 멈추고, 흔들리고, 멈추고. 언제까지나 그걸 바라볼 수 있겠다 싶었다. 아이스 카페라떼는 이미 다 마시고 호두와플도 남김없이 먹어버렸지만 그렇게 한참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카페가 위치한 곳은 탄동천 옆 지질연구소 건물 1층이었다. 건물 바로 앞으로 좁은 산책로가 나 있었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물이 흘러가는 건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에 바닥 공사를 끝낸 하천은 흙탕물만 얕게 흘러가고 있을 터였다. 산책로 양쪽에 늘어선 벚나무의 꽃은 진 지 오래고 이제 버찌가 매달려 익어가고 있었다. 붉은 버찌는 자그마했다. 작고 붉은 열매를 생각하다가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화들짝 놀랐다. 이토록, 아무 할 일도 없을 수 있다니.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카페의 다소 황량한 내부, 빈 테이블들. 그 앞에서 나는 그만 힘이 빠져버렸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습관적 생각이 빈 머리를 스쳤다. 그때 녹음이 우거진 산책로로 낯익은 색이 들어왔다. 보라라고 해도 좋고, 자주라고 해도 좋은, 갓 씻어낸 자두의 빛깔을 닮은 바람막이 점퍼. 저 색, 내가 꼭 마음에 들어 잃고 나서 아쉬워했던 그 빛깔이었다.

그런데 저 여자, 창백한 안색에 마른 몸을 한 낯선 여자가 그 점퍼를 입고 있었다.

지난주에 점퍼를 잃어버렸다. 점퍼를 벗어 허리에 묶고 뛰어가던 중이었다. 점퍼가 바닥에 흘러내린 줄도 모르고 한참을 달렸다. 뭔가 허전해 허리춤을 살폈다. 탄동천을 따라가는 산책로를 지나 제법 강폭이 큰 갑천으로 나아갔을 때였다. 돌아왔던 길을 되짚어 갔지만 이미 점퍼는 사라지고 없었다.

여자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 시야의 한 귀퉁이를 그녀가 차지했다. 내가 앉은 자리는 벽 쪽이라 창가와는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그녀가 들어와 그 자리에 앉기 전에 창을 가리는 것이라고는 의자와 테이블밖에 없었다. 녹색과 노랑이 가득한 유리 캔버스에 낯선 인물이 추가되었다.

점퍼는 정말이지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새것처럼 보이는 점퍼는 보풀이 인 운동복 하의와 어울리지 않았다. 운동화 뒤축은 심하게 닳아 있었다. 내 옷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꼭 그것이 내 것만 같아서 유심히 보게 되었다. 내 점퍼는 두어 번밖에 입지 않아 새 옷 냄새가 났다. 아직도 그 냄새가 날 것 같았다. 그녀를 살펴보는 사이 나는 적의가 누그러지는 걸 느꼈다. 뭐랄까, 상대가 되지 않는 나약한 적을 만난 느낌이랄까. 푸석하지만 단정하게 단발로 자른, 유난히 새카만 생머리. 고개를 숙여 얼굴에 그늘이 질 때는 쉰이 훌쩍 넘어 보였는데 고개를 들어 햇빛을 환하게 받으면 새하얀 얼굴이 갓 마흔을 넘긴 듯도 했다. 그녀가 일어났을 때 나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계산대로 가 카모마일을 시키고, 다시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햇빛을 받은 점퍼는 보라보다는 자주에 가까워 보였다. 화장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 때문인지 점퍼의 색상은 더욱 도드라졌다. 눈썹도 옅고, 코도 나지막하고, 입도 작고, 무표정한 얼굴은 정말이지 희미한 인상이었다. 쓱쓱 손으로 지워도 깨끗이 흔적 없이 사라질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 옷이 내 것이 아니라도 물어볼 수는 있으니까. 차를 다 마셨는지 그녀는 더 이상 컵에 손을 대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창을 바라보더니 옆 의자에 놓아둔 에코백을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나는 얼결에 뒤따라 나갔다.

공사를 막 끝낸 탄동천 상류와 달리 하류 쪽 둑과 강가에는 풀이 무성했다. 산책로는 둑 위쪽에 자리했고 사람들은 둑 아래로는 잘 내려가지 않았다. 개망초와 노란꽃이 지천으로 피어 들풀과 함께 바람에 흔들렸다. 쇠오리가 새끼를 이끌고 물가에 떠 있었다. 여자는 다섯 걸음 정도 앞서 걸었다. 나무가 제법 우거진 곳은 그늘이 졌지만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무들을 지날 때는 그렇지 않았다. 해가 들었다 그늘이 졌다가를 반복하는 길이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햇빛에 드러났다가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가 했다.

여자가 산책로를 벗어나 탄동천에 면한 과학공원 입구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공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유리온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생물전시관이었다. 나도 틈을 두고 들어갔다. 시큼한 더운 숨이 온실 내부를 채우고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를 가진 열대 식물들, 화려한 빛깔의 커다란 꽃들이 온실로 쏟아지는 빛 아래 젖은 숨을 내뿜고 있었다. 작은 분수가 있는 연못에 금붕어가 헤엄치고, 작은 늪에 수초가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짙은 꽃향기가 어디선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여자를 찾아다니다가, 작은 수조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그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그녀가 자리를 뜨고 나서 나는 수조를 들여다보았다. 수조 귀퉁이에 생물명과 습성이 적힌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악어거북. 좁은 수조에 몸을 구겨 넣은 녀석의 온몸에 녹조가 끼어 있었다. 등갑에 난 세 개의 융기, 새의 부리처럼 생긴 턱이 독특했다. 나는 처음에 그것이 가짜 같다고 생각했다. 박제가 아닐까 싶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이끼 낀 바위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코디언 같은 주름진 목을 뻗으며 콧구멍을 수면 위로 내놓는 모습을 보고서야 녀석이 살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살아 있었다. 좁은 곳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면서도 살아 있다는 게 나에겐 충격이었다. 저런 것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사냥의 의지도 없이 움직일 수도 없이 사료에만 의지한 삶. 나는 문득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내 손등에도 녹조가 끼어 초록빛으로 일렁이고 있는 듯해 괜히 두 손을 털었다. 악어거북에 쏠려 있던 눈길을 들었다. 여자는 이미 자리를 옮겨 보이지 않았다. 온실 안을 둘러보았지만 여자는 나가버린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싶기도 했다. 조금은 허탈했지만 말을 걸 자신도 없었다.

그날 이후 여자와 산책로나 카페에서 서너 번 마주쳤다. 날이 더워져서 산책을 하려면 이른 오전에 나서거나 저녁에나 나와야 했다. 그녀 역시 오전 산책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늘 비슷한 시간대에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그 점퍼를 입고 있었다. 이제는 더울 법한데도 그랬다. 점퍼에 대해 물어보는 건 거의 포기했다. 그 점퍼를 한두 명이 산 것도 아닐 테고 그저 비슷한 옷이려니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상하게도 점퍼보다는 점퍼를 입고 있던 그 여자의 이미지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느 아침 조깅을 하고 더위를 식히러 카페에 들어갔을 때 여자가 있었다. 벽을 따라 좌석이 하나로 이어진 자리에 그녀는 앉아 있었다. 자리가 마땅치 않아 그녀 옆쪽에 앉았다. 길게 이어진 의자 앞으로 두 개의 테이블이 적당히 떨어져 있었다. 여자는 오늘도 그 점퍼를 입고 있었다.

갑자기 여자가 말을 걸었다. 희미한 인상과는 달리 명랑한 목소리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외까풀의 갸름한 눈매가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갈색 눈동자는 투명했다. 그녀가 미소 짓자 덧니가 드러나며 장난스런 얼굴이 되었다.

“자주 보네요.”

나는 놀랐다.

“네……”

“열심히 뛰던데요?”

여자는 봇물 터지듯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눈가에 잔주름이 많았다. 가까이서 보니 쉰은 넘어 보였다. 얘기를 나누고 보니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연구단지 가까이에 동네가 하나뿐이라 그녀도 거기에 살고 있으리라 짐작했었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는 내가 사는 아파트와 가까웠다. 애는 없고, 책을 즐겨 읽고, 산책과 도서관 나들이가 전부인 여자 같았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최근에 개설한 교양강좌에 대해 말하며 나에게도 권했다. 여자가 말을 건네는 게 싫지 않았다. 결국 점퍼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지만, 나 역시 그녀에게 묘한 호기심을 느끼던 차였다. 그렇게 말을 튼 이후로 우리는 종종 만났다. 함께 산책을 하고 도서관을 다녔다. 나이 차이는 좀 났지만 책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이도 잊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송기영이었다. 기영은 자신을 힘들게 했던 시댁 식구들 얘기를 자주했다. 처음 인사드리러 간 날 그녀의 시어머니 될 사람은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고 했다. 어쩌면 그때 그만두었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왼쪽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동작을 반복하곤 했는데, 그 이야기를 할 때도 그랬다. 나는 조용하면서도 사려 깊은 그녀가 좋아졌다.

한번은 도서관 시청각실에서 상영해주는 영화를 함께 보러 가기도 했다. 영화는 세 명의 여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 놓고, 그들을 교차시켜 보여줬다. 영화는 좀 무거웠다. 두 인물이 자살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강물 속으로 휩쓸리고, 리차드 브라운은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기영은 몰입해서 그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시청각실은 어두웠다. 불을 끄고 빔을 쏘아서 영화를 상영했다. 화면 상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럭저럭 볼 만했지만 화면은 물 빠진 청바지처럼 흐린 편이었다. 힐끗 바라본 기영은 조용한 얼굴이었지만 화면을 따라 그녀의 내면도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듯했다. 화면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비추었다.

“이 영화 다섯 번째 보는 거야.”

영화를 보고 나오며 그녀가 말했다.

도서관 복도 자판기에서 나는 커피를 뽑았다. 그녀는 율무차를 뽑아서 의자에 앉았다.

기영은 왼쪽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왼쪽 손바닥 안쪽에는 빗금을 그은 듯한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창을 통과한 햇살이 그녀의 이마에 떨어지고 있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녀의 얼굴은 진지했다. 나는 그녀의 왼손을 힐끔거렸다. 커다란 흉터가 손바닥 중앙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쩌다 저렇게 큰 흉터가 생겼을까, 나는 궁금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등장인물 중에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했어. 다른 이들이 계속 살아가도록.”

버지니아 울프가 강물에 휩쓸리는 장면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하지만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읽지 않은 나로서는 인물들에 대한 의구심이 남았다. 그에 비해 기영은 소설을 읽은 모양이었고, 그 영화 속 인물들에 깊이 공감하는 듯했다. 기영은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녀는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내 손바닥을 펼쳐 자신의 손으로 훑었다.

“이 깨끗한 손.”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기영이 그런 얼굴을 하는 게 싫었다.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탄동천 산책로와 도서관은 멀지 않았다.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벚나무 가지에 붙은 버찌들이 검게 익어 있었다. 나는 버찌를 따서 그녀에게 주었다. 입술이 검게 물들었다. 나도 버찌를 입에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첫맛은 달콤했고 끝 맛은 쌉쌀했다. 손끝에 검은 물이 들었다. 버찌가 터져 검붉은 핏자국 같은 얼룩이 손에 남았다. 길 위에 떨어져 내린 버찌 열매가 발밑에서 타닥타닥 터졌다. 길 위로 온통 검은 얼룩이 졌다. 우리는 그 길을 말없이 끝까지 걸었다.

날이 너무 더워져서 우리는 밤 산책을 즐기게 되었다. 코스는 늘 같았다. 탄동천을 따라 걷다가 생물전시관 앞을 지나 갑천으로 나갔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손을 꼭 잡고 걸었는데 그게 그리 싫지 않았다. 남편은 늦게 들어오는 편이라 내가 밤늦게 운동하는 걸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밤 산책은 가끔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탄동천 가에 가로등이 별로 없어 길은 어두웠고 불 꺼진 과학공원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캄캄한 어둠 속, 공원 한쪽을 차지한 공룡들은 검은 몸을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했으며 텅 빈 주차장 한쪽 귀퉁이에 불한당들이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꼭 맞잡고 씩씩하게 걸었다. 오직 걷기 위해 태어난 산책로의 아주머니들처럼 의기양양했다. 기영은 문이 닫힌 생물전시관 앞을 지나다가 내게 말했다.

“악어거북 보고 갈까?”

“네? 이 시간에요?”

그녀는 어떻게 알았는지 관리자가 드나드는 것 같은 뒷문을 찾아내 전자키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한 번 틀리고, 두 번 틀리고, 경고음이 잠깐 울리고 꺼지는 동안 나는 조마조마했다. 그리고 세 번째 만에 문이 열렸다. 나는 기영에게 어떻게 번호를 알았냐고 묻지도 못하고 가만히 뒤따라갔다. 유리온실 안은 어두컴컴했다. 이끼가 잔뜩 낀 지하 묘지처럼 습했다. 그녀는 휴대폰의 보조등앱을 켰다. 낮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불빛이 닿는 곳에 늘어진 잎사귀들은 야생성을 내뿜고 있었다. 그 커다란 잎 뒤에 야생동물이 뛰어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악어거북이 있는 수조로 갔다. 악어거북은 목을 껍질 속에 숨긴 채 웅크려 있었다. 그녀는 나를 이끌고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연못에 빛을 비추니 금붕어 서너 마리가 헤엄치는 게 보였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바닥에 놓여 있던 작은 삽으로 금붕어 한 마리를 조심스럽게 떴다. 금붕어가 버둥거리자 손으로 그 위를 덮으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뭐 하는 거예요?”

그녀는 나를 끌고 다시 악어거북이 있는 수조 앞으로 갔다. 그녀는 수조의 뚜껑을 한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금붕어를 그 안에 넣었다. 금붕어는 물속에 들어가자 놀라서 버둥거렸다. 그럼에도 악어거북의 존재는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기껏해야 커다란 바위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악어거북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금붕어가 눈앞에 왔다 갔다 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한참 그것을 쳐다보다 맥이 빠져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악어거북의 힘센 턱이 벌어져 금붕어의 몸통을 갈가리 찢어 먹기를 기대했는데. 유리온실 밖으로 나오며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다리 아래, 갑천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걸으며 그녀가 말했다.

“악어거북은 정액을 보관할 수 있어서, 수컷이 없어도 원할 때 알을 낳을 수 있대. 평생 단독으로 살아가는 녀석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밑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두워서 조심스러웠다.

“남자라는 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살게 되었네.”

“이렇게? 어떻게요?”

“모르겠어. 이 세계가 나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그녀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더 꽉 잡았다. 나는 덥다면서 가볍게 그 손을 털어냈다. 바람이 불자 다리 밑에 고인 물에서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남편과 다툰 날이었다. 왜 싸웠는지 싸우다보니 잊어버렸다. 서로를 비난하고 분노를 터뜨렸다. 아마 나는 나 자신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밖으로 나갔지만 신혼 때처럼 남편이 나를 찾으러 나오지는 않았다. 날은 어두웠다. 밤 9시. 딱히 갈 곳이 없어 나는 동네 카페에 들어갔다. 손님은 나밖에 없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카모마일 차를 마시며 기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기영은 답이 없었다.

창밖, 길 건너에 지붕이 있는 평상이 보였다. 평상 뒤에는 초등학교 담장이 있었다. 그 평상 한쪽에 뚱뚱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한국 사람이 아니었다. 사리를 걸치고 있어서 인도 사람인가 했다. 본의 아니게 우리는 마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길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가라앉아 있는 얼굴이었다. 아마 이 동네에 사는 다른 외국인 여자처럼 연구원인 남편을 따라 이 낯선 곳에 왔을 터였다. 말도 통하지 않고, 자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 한 남자의 트렁크가 되어 비행기에 실렸겠지. 이곳에 온 다음에야 그녀들은 자신이 어떤 삶을 택한 건지 뒤늦게 깨달을 것이다. 공허한 눈길이었다. 이제 와서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나는 기영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기영에게서 뒤늦게 연락이 왔다. 문을 거의 닫을 때쯤 그녀가 카페로 들어왔다. 갈라져 조각난 얼굴이 그제야 하나로 모아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부터 덥석 잡았다.

“무슨 일이야?”

“아무 일이요.”

“아무 일?”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요.”

그녀는 헛웃음을 웃었다.

“좋아요.”

“뭐가?”

“언니 얼굴을 봐서요.”

설거지를 하다가 나왔는지 그녀의 손은 물에 젖어 있었다. 고무장갑을 끼지 않고 설거지를 하는 게 그녀의 습관이었다. 그렇게 급히 뛰어온 것이었다. 물기 묻은 손도 닦지 못할 정도로.

“저 여자 좀 봐요.”

그녀는 길 건너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쓸쓸해 보이네.”

“내가 더 쓸쓸해 보여요, 저 여자가 더 쓸쓸해 보여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넌 지금 웃고 있잖아.”

나는 정말 웃고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낄낄대고 있었다. 내 표정이 ‘언니가 있어 다행이에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남편 따위는 정말 쓸모없어요. 내 말에 그녀는 깔깔거렸다. 그것도 없으면 아쉬워질걸.

“오늘 산책 갔다가, 식물원에 들렀어요.”

그녀는 내 말에 귀 기울였다.

“악어거북이 사라졌어요.”

“악어거북?”

“몰라요? 식물원에 있는 거북이요.”

“아.”

“죽었나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요. 그런데……”

나는 카모마일 티백 끝에 달린 실을 잡고 물속에 빙빙 돌렸다.

“부산해양박물관으로 갔다네요. 떠났다 하네요.”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표제·일러스트 = 조혜정
표제·일러스트 = 조혜정

“평생 그 수조에서 떠나지 못할 거라던 악어거북이 부산까지 갔다잖아요.”

내 목소리에 카페 주인이 돌아다보았다.

“그런데, 나는…… 뭐하고 있는 거죠?”

하루는 기영이 집에 와서 자고 가라고 했다. 공무원으로 일하는, 그녀의 남편이 출장을 떠난 날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 옷을 챙겨 그녀의 집에 갔다. 서른 평 정도의 이십 년이 넘은 오래된 아파트였다. 그녀의 집에 놀러가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자고 온 적은 없었다. 거실에 상을 펴놓고 바닥에 마주 앉았다. 그녀는 상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불쑥 그녀에게 물었다.

“손은 어쩌다 그랬어요?”

그녀는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피비가 빠져나간 자리야.”

“피비?”

“털이 짙은 자주빛 새. 참새만 한데 몸통이 더 날씬하고 긴, 까만 눈 위에 노란 털이 모자처럼 동그랗게 자라난, 아주 예쁜 새지. 그 새는 내 머릿속, 가슴속, 골반 뼈 아래 어디든 날아다녔어.”

그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방직공장에 들어가 일을 했다고 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 앞에 서서 끊어진 실을 이어주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불량한 실패들을 칼로 잘라내고 새로 끼우기도 했다. 작업복 주머니에는 칼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졸음이 늘 문제였다. 3교대로 근무하는 한밤, 그녀의 몸이 아슬아슬하게 기울었다가 세워졌다가를 반복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지루하거나, 졸릴 때 상상의 새 피비를 불러냈다. 피비의 맑은 울음소리가 귓속에 가볍게 울렸다. 손등에 올라온 새의 목덜미를 가볍게 어루만져주었다. 하지만 가끔씩 피비는 통제 불능이 되었다. 온몸을 돌아다니던 새가 제 맘대로 튀어나와버릴 때가 있었다. 목에 걸린 새가, 비명이 되어 뛰쳐나오려 할 때 그녀는 입을 꾹 닫고, 눈을 부릅떴다. 새벽 서너 시쯤이 늘 고비였다.

“졸려서 죽을 것 같은 날이었지. 피비의 울음소리에도 졸음이 달아나지 않았어. 흰 장막이 내 머리를 뒤덮고 있는 듯했어. 난 잠에 취해 몽롱했고…… 실이 뒤엉킨 실패를 잘라내려고 칼을 내리그었는데, 갑자기 왼쪽 손바닥에서 피비가 튀어나오지 뭐야.”

그녀는 내 눈앞에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검붉은 흉터자국이 한눈에 들어왔다.

“피비는 그때, 여기서 빠져나가버렸어. 영영 사라져버렸지.”

말을 끝낸 그녀의 시선은 허공에 꽂혀 있었다. 비가 내리는 밖은 어두웠다. 베란다 창에 우리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기영의 집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그녀의 시선을 뒤좇았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사고 후에 손도 느려지고…… 몸이 오래 아팠어. 모든 게 두려워졌어. 잠깐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할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겨우 열아홉에 결혼한 것도 그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어.”

기영은 고개를 떨구었다. 카모마일의 노란 꽃송이들이 유리 주전자 안에 떠 있었다. 먼지 같은 꽃잎들이 물속에 흩어졌다.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서 그녀에게 물었다.

“왜, 카모마일만 마셔요?”

“불면증 때문에. 밤마다 소리가 들리거든…… 비가 와서 그런가, 오늘따라……”

그녀는 천장을 가리켰다. 파란색 고리가 달린 네모난 복층의 입구였다. 고리를 잡아당기면 계단이 펼쳐졌다.

“무슨…… 소리요?”

그녀는 키득거리며 죽은 아이들이 저기서 산다고 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어둠속으로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내가 얘기 안 했나?”

시댁에 갔다가 논두렁에서 뱀을 보고 놀라 첫 유산을 한 이후로, 줄줄이 자연 유산이 이어졌다고 했다. 아기집이 약해서, 아기가 크면 자연적으로 흘러내려 버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걸 미끄럼틀을 탄다고 표현했다. 여섯 차례의 유산이 있었고, 그 뒤로는 임신도 잘 되지 않아 인공수정, 시험관 해보지 않은 게 없었다. 마흔이 될 무렵 시댁 식구들 앞에서 그녀는 일종의 고해성사이자 선전포고인 자기 고백을 하며 울음을 쏟았다. 그건 자해나 위협과도 흡사했다. 온몸을 떨며, 이제 자신은 포기했다며, 너무 힘들고,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고, 그러니 그렇게들 아시고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는 요지의 말을 울먹이며 붉어진 얼굴로 내뱉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기영의 얼굴은 추했다. 그녀는 그들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울부짖었다. 그런 자신의 추함이 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회색의 긴 홈드레스를 입은 기영은 무릎을 세워서 끌어안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홀가분하다고 말하는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텅 빈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왔다 갈 때마다 화분을 샀어. 처음 산 화분이 마지나타였어. 가느다란 새 다리 같은 줄기 끝에, 가늘고 긴 잎사귀들이 장식 술처럼 달려 있는. 난 중얼거렸지. 아이에게. 마지나타에게로 가라, 마지나타에게로 가라.”

그런 화분들이 복층 베란다에 가득하다고 했다. 한 가득이라고, 거기서 꽃도 피고 새도 운다고. 오늘따라 기영이 횡설수설, 이야기를 잘도 지어낸다고 나는 생각했다. 비가 와서, 단지 감상적이 된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

간단히 씻고 우리는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인견으로 된 여름 침구가 시원하게 몸을 감쌌다. 그녀는 괜찮으냐고 물었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그녀는 계속 잠을 뒤척이는 듯했다. 나 역시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흰색 커튼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어둠은 검은 스펀지처럼 우리를 덮었다. 나는 상상했다. 자주빛 새와 아이들. 아이들이 정말 저 위에 있을지. 지금도 그녀가 아이들의 기척을 느끼는지 궁금했다. 나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아직 잠들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웠다가, 바로 누웠다가를 반복했다.

내 삶은 불 꺼진 무대 같았다. 아무도 찾아오지도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무엇도 그 위에 새로이 세울 수가 없었다. 결혼하며 남편의 직장이 있는 곳으로 옮겨왔다. 오래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었다. 결혼은 지루했다. 이 도시에서 내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직장은 없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몇 년이 흘렀다. 결혼 5년 차, 내년이면 마흔이었다. 아이가 간절하지는 않았지만 또 기영처럼 혼자 늙어갈까 봐 두렵기도 했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나는 그녀같이 될까? 카모마일처럼 메마른 꽃, 뜨거운 물에 담그면 향기를 풍기지만 이내 스러지고 마는. 행복은, 매일 버려지는 음식쓰레기처럼 악취를 풍기며 나를 찾아내라고 압박했다. 짧은 하루, 무의미한 하루 안에서 결국 찾아내지 못한 추상적인 행복은 그렇게 매일 버려졌다. 티브이나 인터넷에 떠다니는 이미지들과 함께.

잠결에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고래의 숨소리 같기도 한 아득한 소리였다. 허밍 같은 소리, 멜로디가 담긴 소리였다. 타다다닥, 천장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도 간간이 섞여들었다. 나는 꿈인가 싶어 눈을 번쩍 떴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 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내 쪽으로 돌아누운 기영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저기…… 무슨 소리 못 들었어요?”

그녀는 자그마한 몸을 일으켰다.

“너도 들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그녀의 가녀린 실루엣이 드러났다. 어두워서 그런지 가벼운 그녀의 몸은 젊은 여자의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나에게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비쩍 마른 손을 펼쳐 내 얼굴을 감쌌다. 워낙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나는 반응하지 못했다. 그녀의 메마른 입술이 내 입술 위로 포개졌다. 가느다란 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들었다. 매끄러운 혀가 가볍게 안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고마워.”

그녀는 무너지듯 내게 안겨왔다. 나는 몸을 기대오는 그녀를 떠받치듯이 안았다.

“매일 밤, 그들이 나를 불러.”

그녀는 나에게 위로 올라가보자고 했다. 무서웠지만 호기심이 더 앞섰다. 그녀는 복층 계단을 잡아당겼고 쿵 소리가 나며 계단이 아래로 내려왔다. 덩달아 계단에 있던 까만 벌레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영이 먼저 위로 올라갔다. 비스듬한 사다리처럼 생긴 계단을 딛고 구멍 속으로 그녀의 상반신이 먼저 사라졌다. 검은 입이 그녀를 삼키고 있는 것만 같아 섬뜩했다. 그녀가 계단을 다 오르고 나도 뒤따라 올라갔다. 복층은 어두웠다.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희미한 빛에 누렇게 뜬 벽지가 보였다. 텅 빈 방, 낡아가는 빈 공간이 황량했다. 불투명한 베란다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베란다 너머로부터 그 허밍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뭔가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불투명한 유리에 검은 그림자가 얼비쳤다. 나는 얼결에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왼손 흉터가 손바닥에 느껴졌다. 베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는가 싶었다. 마지나타, 떡갈나무, 벤자민, 그 외의 온갖 이름 모를 나무와 화초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마치 작은 식물원처럼 화분에서 자라났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숲을 이루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공간이었다. 어둠 때문인가?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자주빛 새들이 나무에 내려앉아 사람이 내는 허밍소리로 노래했고, 아이들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었다.

우리는 사라지지 않아.
붉은새들이 우리를 깨워주었지.
우리는 잠들지 않아.
마마.

숲 위로 붉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몸에 닿지 않았다. 기영이 말했다.

“이게 내 인생이지. 언제든 나는 달아날 수 있어.”

기영은 초연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익숙한 풍경이라는 듯 그녀는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날 밤의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어 우리는 간단히 밥을 먹고 헤어졌다. 그 이후로 한 달 정도 서로 연락이 없었다. 나도 기영도 서로를 찾지 않았다. 나는 아침마다 탄동천 산책로를 뛰었고, 카페에 들를 때마다 그녀가 없나 두리번거렸다. 뜨거운 낮에는 도서관에서 더위를 피했다. 집에 오면 영화를 다운받아 봤다. 그렇게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여느 때처럼 한바탕 뛰고 나서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자리에 앉아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창밖으로 녹음이 짙었다. 그 위로 햇볕이 빽빽하게 쏟아져 내렸다. 유리문을 밀며 누군가 들어왔다. 남자처럼 짧게 자른 머리 때문에 못 알아볼 뻔했다. 기영이었다. 흰 티셔츠에 무릎까지 오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전히 말랐지만 뛰어와서 그런지 볼이 붉었다. 그녀는 웃음기 머금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얼빠진 얼굴로 그녀를 봤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새들이 한꺼번에 몸속에서 날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잔을 손으로 감쌌다. 차가운 기운에 좀 차분해지는 듯했다. 그녀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어떻게 지냈어?”

“그냥…… 저냥요.”

그녀는 좋아 보였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수술했어.”

나는 놀라서 그녀를 보았다.

“하이푸 시술, 별거 아냐, 자꾸 혹 같은 게 나서.”

몇 명의 사람들이 왁자하게 들어오며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날의 일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우리는 정상일까? 그날 본 일은 환상인가 실제인가. 그녀는 그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손을 들 때마다 손바닥의 그 흉터가 드러나 보였다.

창으로 햇빛이 길게 들어왔다. 강둑에 웃자란 풀들이 가득했다. 초록이 햇빛 아래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하게 열린 출구 같았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 걸었다. 날이 뜨거웠다. 나는 가벼운 어지러움을 느끼며 그녀의 팔을 잡았다. 좁은 탄동천에 자주빛 점퍼가 떠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물에 빠진 시체처럼 부풀어서 강물을 따라 흘러갔다. (끝)

 

이혜정
이혜정

[당선소감]소설 - 이혜정

“‘다정한 빛’ 소설에 담아 매일 쓸 것”

오랫동안 소설의 주변에 머물렀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그것은 빛과 같았습니다. 동경하면 동경할수록 내가 할 수 없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여전히 그렇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이야기는 공기 중을 떠가고 비추는 빛으로 남아 그 자리를 따듯하게 데우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나에게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게, 어느새 저 홀로 살아있습니다.

다정한 빛을 소설에 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살아있는 한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하나의 목소리가 주어졌다면 그 목소리로 쉬지 않고 말하겠습니다.

사랑한다고, 우리가 지금 여기 있다고. 엄마를 지난여름에 잃었습니다. 아파서 목소리를 잃어가던 엄마의 음성이 아직 제게 남아 있습니다. 그 다정한 목소리를, 사라지지 않는 목소리를, 다정한 빛을 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기회와 용기를 주신 경상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언제나 제 곁을 꿋꿋이 지켜주신 아빠, 늘 사랑하고 감사해요. 처음 문학을 알게 해주신 김윤수 선생님, 김원우 선생님, 이성복 선생님, 장옥관 선생님, 손정수 선생님 감사합니다. 일분소설 문우님들 고마워요. 눈과 비와 바람과 계절처럼, 매일 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약력]이혜정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졸업
-2004년 계명문화상 단편소설 부문 당선

 

김인숙
김인숙

[심사평-김인숙]“존재, 수없이 반복돼 온 근본적인 질문”

본심에 올라온 7편의 작품 중 ‘피비’ ‘엄지’ ‘형제여, 그대는 어디 있는가’ 등 세 작품에 주목했다. 세 작품 다 고유의 개성이 다르고 각각의 매력이 넘쳤다. ‘형제여 그대는 어디 있는가’는 한국 전쟁 시기를 다룬 작품이다. 전쟁의 한 장면을 짧은 단편에 옮겨 싣는 것은 웬만한 이야기꾼이 아니고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전쟁이라는 단어 자체에 이미 너무 많은 서사와 너무 많은 의미가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많은 서사와 의미에 대해 독자들이 선험적으로 동감, 혹은 절감하고 있는 부분들이 압도적이기도 하다. 덕분에 소설의 시작부터 독자들과 안전한 동행을 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형제여 그대는 어디 있는가’는 웅대한 서사를 짧은 단편에 녹여내는 훌륭한 솜씨를 보여주는 데는 성공하고 있으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전쟁 그 너머, 혹은 그 내부를 다시 한번 환기하는 데에는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앞으로의 작품을 기대한다.

‘엄지’는 지성이 있지만, 단순 반복만을 하는 조립형 기계로 만들어져 그 지성을 사용할 데가 없는 로봇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사용할 필요가 없는, 사용할 용도가 없는, 말하자면 몸에 갇힌 지성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래서 이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으로 읽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오늘의 이야기로 읽힌다. 지성이라고 믿고 있으나 어쩌면 편견에 갇혀있는, 오늘날의 우리에 대한 자화상. 흥미로운 설정이지만 이야기가 좀 더 풍성하게 흘러가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피비’는 두 여성의 이야기이다. 홀로 살아가는 여성과 결혼이라는 제도에 갇혀버린 또 한 여성의 위험한 우정에 대한 이야기. 여성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존재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치 주어진 옷을 입듯이 주어진 제도에 갇혀, 그 안에서 서서히 소멸돼가는 자아. 이제 와서 무엇이 새로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 이러한 질문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수많은 소설에서 수없이 반복돼 온 질문이다. 그러나 그만큼, 그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여전히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 질문에 도달하려는 ‘피비’의 안간힘이 안타깝다. 그 안타까움을 안정적인 문장과 깔끔한 구성이 받쳐주고 있다.

손바닥에 상처를 남기고 간 상상의 새 피비는 앞으로 이 작가의 날개가 되어줄 것이다. 축하한다.

■[약력]
-전태일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수상
-<함께 걷는 길> <칼날과 사랑> <유리구두>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그 여자의 자서전> <핏줄> <불꽃> <꽃의 기억> <모든 빛깔들의 밤> 등 출간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