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의 탄생 설화을 전하는 울산시 남구 황성동 개운포 앞바다에 위치한 작은 돌섬 처용암.
 처용암이 바로 보이는 개운포 세죽마을은 이제 사람들의 왕래가 뜸하다. 간혹 인근 공장 직원들이 개운포 포구에서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바다위에 묵묵히 떠있는 처용암을 바라보며 머리를 식히고 가기도 한다.
 고려 문신 이제현(1287~1367)을 비롯해 조선 중기 문신 정유길(1515~1588), 조선 후기 학자 권상일(1679~1760) 등 수많은 학자들이 개운포와 처용암을 소재로 한 한시를 남겼다. 대부분이 처용암에서의 처용이 나타났음을 노래한 것이다.
 이 가운데 권상일의 "개운포"는 처용암에 수궁과 통하는 작은 통로가 있다고 노래한 것이 특이하다. "먼 갯가에 푸른 바다가 넓은데/기이한 바위는 작은 구멍으로 통하였네./구름 걷히고 해 나오자 신옹이 있었으니/수궁에서 왔다네."(이하 생략, 성범중 울산대국문과 교수 역)"
 1천120여년 전 신라 헌강왕이 이곳 개운포를 찾았을 때 나타났다는 자욱한 구름과 안개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개운포 앞바다에 있는 작은 처용암 너머로 보이는 온산 석유화학공단에서 희뿌연 연기를 조금씩 뿜어내고 있다.
 1970년대부터 개운포 일대에 공업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세죽마을 사람들은 중구 다운동으로 떠났다. 한때는 둥근 해안선 곁으로 낡은 집들이 아기자기하게 자리잡은 비경의 어촌마을이었지만 지금은 공장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처용가비"가 세워진 곳에 서서 포구를 둘러볼 때는 간간이 공장 작업장에서 들려오는 소리 조차도 넉넉한 포구에 묻히는 듯 하다. 버려진 고깃배가 포구 곳곳에 나뒹굴어 민원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처용암과 나루터 사이에 떠 있는 두 척의 고깃배는 처용암의 신비감을 더한다. 그나마 몇 남지 않은 옛날 집도 정취를 더한다.
 그래서인지 평생을 세죽마을에서 보내 온 이 마을 주민 10여명은 쉽사리 개운포를 떠나지 못한다. 장성한 자식들을 따라 이주지역으로 갔던 이들도 비릿한 바닷내음이 그리워 다시 옛 집을 찾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시내로 함께 나가기를 권하는 자녀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집이 철거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개운포를 떠나지 못할 사람들이다.
 고향을 등지고 개운포를 떠나야 했던 이들에게는 60~80년 세월이었지만, 처용이 처용암에서 나와 개운포를 밟고난 뒤 이 곳을 떠난 것은 1천년이 넘는 세월이다. 오랜 처용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개운포 처용암. 삼국유사는 처용의 탄생을 이렇게 전한다.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이 개운포로 놀러왔다가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캄캄하게 덮여 길을 잃었다. 일관이 동해 용이 조화를 부리는 것이니 좋은 일을 해 줘 풀어줘야 한다고 하자 헌강왕은 용을 위해 절(현재 망해사)을 지으라고 했다. 이 말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졌다. 동해의 용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나와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 헌강왕을 따라와 정사를 보필한 용의 아들이 처용이다.
 처용은 구름이 걷혔다는 뜻의 개운포 앞 처용암에서 이렇게 등장했다. 최근 처용의 정체에 대한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어쨌든 용의 아들로 전해지는 처용은 서울(경주)로 가 아름다운 아내를 맞고 급간이란 직책도 내려 받았다. 이후 아름다운 아내를 흠모한 역신이 아내를 범한 것을 보고 부른 노래가 신라 향가 "처용가"다.
 "동경 밝은 달에 밤새도록 노닐다가/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김원중 건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 처용가의 현대어 번역문)
 처용가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지만 아내의 부정에도 노래를 부르는 처용에 감동한 역신의 물러남으로 처용은 "관용"의 상징 인물이 되었다. 울산이 "공업축제"를 "처용문화제"라는 이름을 바꾼 것 또한 삼국유사가 전하는 "처용설화"를 내세워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도시임을 알리기 위함이 아닐까.
 삼국유사의 "처용랑과 망해사" 편에는 또 처용과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만 신라가 망할 것을 경계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의 지신·산신이 춤을 추면서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계했으나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점점 탐닉에 빠져들어 결국 나라가 망했다는 것이다.
 설화의 뒷부분의 이 이야기는 처용이 아내의 부정을 춤과 노래로 경고한 것과도 연결된다. 여튼 헌강왕도 몰라본 처용, 지신·산신의 경고를 뒤로 하고 나라가 망하려 하자 처용은 되돌아갈 수 없는 용궁을 그리워하며 날마다 개운포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 마을에 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현재 세죽마을 맞은 편 처용마을에는 사방 3~5m의 "넓적바위"가 있다. 처용이 용궁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너무 오랜 시간을 앉아 있어 엉덩이 모양의 방석 자국을 남겼다고 한다. 이후 처용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설화와 전설에 따르면 결국 처용은 울산에서 등장, 경주로 떠났지만 다시 울산으로 돌아온 셈이다. 울산만 개운포에는 처용이 태어난 처용암이 있고, 전설의 "넓적바위"가 있고, 헌강왕이 동해 용을 위해 지은 절 망해사가 남아 있다. 울산은 처용의 도시다. 박은정기자 musou@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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