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수환 전 울산대 연구교수

근자에 지역의 한 일간지에 지역사 연구자의 사론 ‘김취려 장군 산소와 선양 사업’이 실렸다. 김취려는 본관이 언양으로 고려 후기 무인으로서 거란족의 침입을 물리치고, 말년에는 문하시중에 오른 명장, 명재상이었다. 그는 사후 ‘위열’(威烈)이라는 시호로 추증(追贈)됐다. 언양에 있다는 김취려의 묘소를 고찰한 이 글은 울산사 연구의 저급한 수준에 대해 성찰을 요구한다.

이 글에는 오자를 비롯해 사실 착오 및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여럿 실려있어 엄밀한 검증을 요한다. 김취려 비문을 지은 정곤수(鄭昆壽)의 ‘昆’은 ‘崑’의 오기, 김취려가 물리쳤다는 나라 요‘(療)’는 ‘遼’의 오기이다. 후술하는 강화도에서 발견된 김취려 묘지석(墓誌石)이 규장각에 있다 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소장품번호, 본관 11941)

그는 주제어로 이렇게 말했다. “김취려는 몽골의 고려 침입으로 강화도에 갔다가 현지에서 사망해 묻혔는데, 전쟁이 끝나고 후손들이 묘소를 언양 화장산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09년 김취려 묘지석이 발견된 강화도의 묘소가 진묘(眞墓)임은 학계와 언양김씨 문중에서 공히 인정하는 사실이다. 묘지석에는 김취려가 “1234년 5월 강화도에서 사망했고, 동년 7월 진강산 대곡동 서쪽 기슭에 장례했다”고 기록돼 있다. 학계에서는 이 묘지석을 공식 사료로 활용하고 있고, 문중에서도 강화도와 언양의 묘소에서 절기를 나누어 제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는 사실과 동떨어진 증거를 내밀며 언양 묘소가 진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위열공 14세손 김천일 장군이 경상도 도사가 된 후 임진왜란 직전 1577년 위열공 산소를 확인하러 언양에 왔고, 언양향교 유림이 그를 안내하여 산소를 확인해 줬다 했다. 또한 언양 유림은 위열공 묘제를 맡아 후손들과 묘제를 올렸는데, 불과 60~70년 전까지 계속됐다 했다.

그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김취려 묘지석이 발견된 후 김씨 문중에서 언양 산소의 진위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때 언양의 산소를 다시 확인한 인물이 남목에 살고 있던 위열공의 22세손 김경환 어른이었다. 김씨는 그때 언양향교를 찾아가 유림 43명으로부터 능골(언양) 산소가 진묘임을 확인하는 약조를 얻어냈는데, 이 문서를 지금도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다.” 이 대목은 언양향교와 소속 유림 43명 그리고 김경환이라는 인물을 구체적으로 언급했기에 엄정한 검증이 필요하다. 언양 유림이 ‘진묘임을 확인하고 약조해 주었다’는 서술이기 때문이다. 향교 유림이 무엇을 근거로, 무슨 권한으로 특정인 묘소의 진위를 확인하고 이를 후손에게 약조하는가? 유림은 개별 문중의 묘소 진위를 감정하는 몰상식한 집단이 아니다.

필자는 2006년 <언양향교지>를 편찬할 때 주필을 담당했다. 당시 수집한 문헌과 구전자료 어디에도 언양 유림이 김취려 묘소를 확인하거나 제향을 주관했다는 내용은 없었다. 위열공의 진묘를 확인했다는 약조도 마찬가지이다. 유림은 향내의 서원건립, 향약제정, 효자·효부 추천 등에 대한 여론을 수렴하지만 사사로운 문중의 묘제는 주관하지 않는다. 문중의 진묘를 확인하는 약조는 더더욱 어불성설이다.

앞에서 본대로 언양의 김취려 묘는 진묘가 아니다. 이 명백한 사실을 모르면서 진묘라 주장하려니 이런 허황한 사설을 늘어놓게 되는 것이다. 연구자의 언양 묘소 진위 여부에 대한 무지는 자신의 것이지만, 언양향교와 관련된 서술 ‘김천일을 묘소로 안내했다거나, 진묘를 확인하는 약조를 했다거나, 묘소 제향을 주관했다’ 등은 언양 유림에 대한 중대한 명예훼손이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김경환씨 후손이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는 약조문을 공개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주장을 철회하고 언양향교와 소속 유림에 대해 공개 사과해야 마땅하다.

송수환 전 울산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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