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걸수 수필가

반세기를 향하고 있다. 신병교육대에서 자대 배치되는 날, 신병 모두에게 “수고 했어”라고 하며 사단장께서 꽉 잡아준 악수의 손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신군부의 수장이라 불리었던 그분도 고인이 된 지 2년이 되어 간다. 광주 시민들과 특히 피해자 및 유족들에게 치유될 수 없는 아픈 상처들을 생각하면 이런 글을 쓰기가 조심스럽다.

그들의 만행 중 일부지만 필자가 직접 지켜 본 삼청교육대 교육생들의 일과를 언급하자면 종일 기압, 강도 높은 고된 훈련밖에 없었다. 아침, 저녁 식사시간에는 연병장에서 한 시간정도 봉체조와 목이 터질 정도로 군가를 부르게 한 후에야 배식을 하였고, 야간 막사에서는 인간의 기본 생리현상 조차도 세 사람이 모여야만 화장실을 보냈다. 인간이하의 취급에 억울함을 토로했고 그 시기에 그들에게는 인격은 애당초 존재하질 않았다.

신군부는 상명하복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직속상관 계엄사령관을 불법감금, 국가권력을 찬탈했다. 참혹한 인권유린 등 용서할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었지만, 냉철한 평가는 우리 후손들의 몫이 아닐까. 혼란한 시기라는 명분을 내세워 5·18광주진압, 삼청교육대, 정치인 탄압 등 씻을 수 없는 많은 과오를 범했다. 더욱이 퇴임 후 천문학적 비자금 은닉만큼은 용서하는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런 부정적 측면이 대다수이긴 하나 긍정적 면도 없지 않는 것 같다.

경제수석비서관에게 당신이 바로 ‘경제대통령’이라고 한 말은 지금도 많이 회자되고 있다. 치솟는 물가를 잡고, 무역도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서게 했다. 근로자가 외국에서 1년만 고생하면 국내에 내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는 것은 철저히 정부에서 물가를 잡아주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그때를 기억한다. 국민의 다수가 “나도 중산층”이라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그 시기 우리들의 자존심이 아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거 다 운이 좋았잖아”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로 3저 호황 때문이야 하며 쉽게 얘기하는 분들도 많았겠지만, 아무리 운이 좋아도 준비하고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일할 수 있도록 정부 관료들을 무한 신뢰하고 지도자로서 역할을 충분히 다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정치적 암흑기인 신군부 시대를 좋지 않은 선입견과 정치적 초점에만 평가하지 말고 공과(功過)에 대하여 한 번쯤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88서울올림픽 유치, 야간통행금지해제, 학생교복과 두발자유화를 실시하였고, 프로야구 및 프로축구 출범, 천하장사씨름대회, 스포츠산업 육성과 컬러TV 보급, 영화산업규제 폐지 등 획기적 한국영화의 발전 기틀을 마련했다. 시대적 소명이긴 하나 악법중의 악법인 연좌제를 폐지시키고 주택임대차보호법 및 공정거래법을 제정하여 서민 생활안정에도 기여했다.

요즘 정치행태는 법안하나 제대로 통과시키지 못하고 모든 것을 정쟁으로만 일삼고 있다. 과거 정부만 탓하고 할 말 제대로 못하는 우유부단한 여당, 사법 리스크에 방탄조끼로 에워싼 야당, 최근에 불거진 돈봉투 사건은 막장 정치드라마의 현장이다.

다들 헌법기관이라며 알맹이 없는 목청만 돋우고, 오직 의원직 연장에만 신경 쓰는 것 같다. 그 옛날의 ‘3김’은 싸우다가도 합의가 되면 서로 양보하고 물러서서 합의점을 만들어 내었다. 작금 강력한 이런 지도자들의 부재가 아쉽다.

목숨 걸고 민주화에 몸 받친 영령들도 이제는 용서하고 화합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가해당사자도, 가해당사자 아들도 아닌 명분이 약 하디 약한 손자가 자기 코트를 벗어 피해자 비석을 닦고, 어루만지며 할아버지를 대신하는 모습을 받아들이는 통 큰 5·18 유족들에게 진한 박수를 보낸다.

강걸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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